[세기말에 서서] 결정된 미래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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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결정된 미래는 없다, 흐르는 강물처럼 가자

삶이 힘들고 앞날이 불안하면 시대를 탓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세상에 태어나도 살기가 어렵다고 각오할 때 희망이 생기고 지혜가 나타난다.

세기말에 서서 되새겨야 할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모 (某) 양의 비디오는 세기말의 인간조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한 젊은 처녀가 애인과의 성희 (性戱) 를 사적인 공간에서 영상으로 남겼다.

그 뒤 그녀는 유명해졌고 그 때의 영상은 어떤 경로로 유출돼 인터넷에 걸리게 됐다.

처음에 이 사건은 하이퍼 - 미디어 시대의 공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도 가해할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가해자가 된다는 공포. 타인의 가장 내밀한 사생활을 손쉽게, 컴퓨터를 켜고 손가락만 몇 번 까딱거리면 볼 수 있다는 사태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세계 구석구석까지 연결된 컴퓨터 네트워크는 통제불능의 투명성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그리하여 20세기의 마지막에 우리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행한 자를 학대하게 되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세계로 진입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필자는 이 문제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동정하고 이해한다는 사실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심코 합장하고 절을 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섹스 안하고 사는가.

몇 년 지난 과거의 일을 갖고 현재의 그 여자를 매도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불쌍하게 됐다.

반응은 여러가지였지만 빡빡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관대함이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인터넷에 의해 '밀실과 광장' 의 경계가 무너지는 역사의 진보는 확실히 낡은 시대의 구속을 깨고 사람들의 마음을 보다 크고 넓은 세계로 열어놓고 있었다.

세기말의 세계는 경제위기와 대량실업, 계층갈등과 지역갈등, 환경문제 등을 치우지 못한 쓰레기처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도덕이나 이데올로기가 미리 정해준 좌석같은 것은 없다.

인생은 혼돈과 우연과 우발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으며 나도 이 시끌벅적한 인생극장에 책임이 있다" 고 생각하는 세대들에 의해 새로운 휴머니즘이 태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 미디어 철학자 구로사키 마사오 (黑崎政男) 는 이같은 세기말 세대의 의식을 '결정론적 카오스' 사상이라 규정했다.

새로운 세대들은 여전히 이승에서의 모든 현상들이 어떤 질서를 갖는 결정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관념을 믿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시작하는 그 시점에서의 상태를 아무리 철저하게 분석해도 현상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잡 (혼돈)' 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관념 또한 믿고 있다.

법칙의 파악이 현상의 지배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21세기를 향한 모든 변화를 설명해준다.

'법칙을 알면 현상은 인간의 완전한 예지와 지배와 제어 아래 놓일 수 있다' 고 생각했던 고전적인 의미의 학문은 정보의 생산으로 대체된다.연륜과 경험의 중요성은 약화되며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은 당연하지만 무의미하다.

아름다움이란 시대가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찾아 가져야 할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세기말에 인간은 자칫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히 무엇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또 무엇이 될 것인가는 적극적으로 자기 시대를 수락한 사람들의 것이다.

현상은 예측될 수 없고 결과는 미리 말해질 수 없지만 우리는 선택한다.

스스로 무엇이 되고자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증명한다.

선택은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자유는 변화에 주눅이 든 정지상태에 있지 않고 사건의 연속 속에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 미래로 가자. 세기말의 불안은 우리의 희망을 꺾지 못한다.

이인화 이화여대교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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