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지역감정'을 생각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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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0여년 전 소위 TK세력이 막강할 때 필자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만찬장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던 어떤 참석자가 필자에게 왜 한국에 돌아가 너희 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하지 않고 한가하게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고만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필자의 연설제목이 이집트를 위시한 후진국들의 자본시장 육성방안이었으므로, 우리에게만 충고하지 말고 직접 너희 나라에도 가서 이런 건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중이었음이 분명했다.

필자는 이를 반농담으로 받아 넘기며 내가 고향을 잘못 만나 한국에 돌아가도 별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과, 그 당시 한국 정권의 호남인 (湖南人) 기피현상을 대강 얘기해 주었다.

마침 같은 테이블에 있던 바레인의 한 금융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쿠웨이트 남쪽 인구 50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국가인 바레인에도 동네의 한 골목 거리를 사이에 두고 이쪽의 주민들과 저쪽의 주민들 사이에 서로 아낙네들의 말투가 틀리고 생각이 달라 쉽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주위의 중동국가들과는 달리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아 국가생존 차원에서 바레인은 이슬람교정신에 위배되는 주류 (酒類) 판매도 허락해가면서 중동의 유일한 국제금융센터로 성장했는데 이런 편협한 지방색을 가진 국가가 과연 세계화에 성공할까 하고 필자는 그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예상했던 대로 90년대 들어와, 특히 걸프전쟁 이후 바레인의 치안상태는 이슬람교도 지파간.부족간의 비등한 갈등으로 급속히 혼란해졌고, 외국 은행들은 하나 둘 철수하기 시작해 중동의 금융센터는 지금 바레인에서보다 더 국제화된 두바이로 옮겨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계화의 추세가 가속되고 있는 현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아도 계급.지역.종교를 뛰어넘는 화합과 절충을 추구한 나라는 흥성하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쇠망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유일한 슈퍼 파워로 군림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전세계에서 이민온 어떠한 인종들도 차별없이 환영해 자기 능력껏 노력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다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 사회가 지역.인종.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국민들을 균등하게 대해주고 동화시키니까 미국에 영주한 이민들도 그에 상응한 노력과 충성심으로 국가에 보답해 부국강병 (富國强兵) 한 슈퍼 파워가 안 될 수 없었다.

30여년을 미국에 살면서도 필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고 한국 여권을 갖고 있으나, 이곳에서 태어난 세 자녀는 당당한 미국 시민으로 그에 상응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고 있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첫째가 미 육군 소위로 하와이 미군기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94년 봄 집으로 갑자기 본인이 전사하면 자기의 은행저금과 가재도구를 정리하는 유산처분자로 아버지를 선정한다는 '유서' 가 날아왔었다.

몇년 지나서 사정을 알고 보니 그해 6월 북한 핵시설에 대한 미국 공격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출전을 준비하며 아들이 보낸 유서였다.

천만다행으로 미국의 북한공격은 보류되고 제네바 4자회담으로 대치됐으니 내 놀란 가슴은 진정됐으나, 이민 2세인 자식이 미국이라는 자기 나라를 위해 스스럼없이 꽃다운 생명까지도 던지려 했다는 현실속에 오늘날 미국 국력의 비결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물며 한 핏줄의 동족인 우리가 동과 서, 영남과 호남 등으로 갈라가면서 지역감정의 갈등을 빚는다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과연 어떠할까. 그것도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 (IMF) 위기라는 국가 초유의 경제위기를 당했던 지난해부터 여와 야가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조상과 후손들에게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

2천4백년 전 로마가 주변의 야만국들에 위협받고 있는 한개의 빈약한 신흥국이었을 때 귀족과 평시민계층간의 갈등이 점차 커지면서 로마 존망 (存亡) 의 위기에 봉착했었다.

그때 평시민들의 버릇을 이번에는 단단히 고쳐야 하겠다고 귀족들이 추대했던 카밀러스라는 국가원수가 오히려 귀족계층들을 잘 설득해 로마의 장래를 위해서는 평시민들과의 화합이 필요하다고 해 이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 기원전 367년에 '화합의 사원' 을 건립해 국민 대화합을 이룩한 결과 천년 로마제국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H G웰스는 설명한다.

메뚜기 이마빼기보다 좁은 땅덩이 속에서 같이 사는 우리들이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국민적 대화합으로 국가 중흥을 이룰 날은 언제일까.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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