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구출 프로젝트에 미 정부·재계도 참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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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은 개인적 방문 형식으로 이뤄졌지만 미 정부와 재계 등이 광범위하게 ‘여기자 구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클린턴의 폭넓은 인맥도 큰 힘이 됐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필요한 항공기를 지원한 다우 케미컬의 최고경영자(CEO) 앤드루 리버리스 . [디트로이트 AP=연합뉴스]

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밥호프 공항에 도착한 ‘커런트TV’ 여기자 로라 링(32)은 취재진에게 “스티븐 빙과 그의 승무원, 앤드루 리버리스 ‘다우케미컬’ 최고경영자(CEO)와 다우케미컬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빙과 다우케미컬은 클린턴에게 비행기 한 대씩을 제공했다.

클린턴이 북한을 오가며 탔던 비행기 ‘보잉 비즈니스 제트’는 사업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빙(44)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 비행기는 지난달 말 모종의 임무를 띠고 미국의 미수교국인 쿠바를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에 도착한 비행기는 흰 색깔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이는 클린턴이 북한의 특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문했음을 강조한 셈이다.

빙은 25시간 비행에 소요된 기름값 등 20만 달러로 추정되는 비용도 모두 부담했다.

빙은 뉴욕의 부동산 재벌인 조부에게서 18세 때 6억 달러(약 7300억여원)를 물려받았다. 스탠퍼드대 중퇴 후 영화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 등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하거나 투자했다. 빙은 민주당, 특히 클린턴 부부의 거물 후원자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경선 때는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캠프에 10만 달러를 냈고, 빌 클린턴의 자선재단에도 1000만 달러 이상 기부했다. 또 올 상반기에는 10만 달러 이상을 로비 자금으로 써 버락 오바마 정부의 환경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굴지의 종합화학 회사인 다우케미컬도 비행기를 제공했다. 워싱턴 포스트(WP)에 따르면 클린턴은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서 캘리포니아 버뱅크까지 이 비행기로 이동한 후 빙이 제공한 비행기로 갈아탔다. 다우케미컬은 클린턴 재단에 5만 달러를 기부했었다. 정계뿐만 아니라 재계에도 미치는 클린턴의 광대한 인맥이 나선 것이다.

◆오바마 정부도 광범위하게 개입=“정부 개입이 없었다”는 백악관 공식 입장과 달리 미 정부 관계자가 사전에 클린턴을 만나 방북을 설득한 것으로 확인됐다. CNN은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지난달 24~25일 클린턴과 만났다”고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존스 보좌관은 “클린턴 같은 인물이 특사로 오면 사면해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북한 당국이 여기자들에게 했다”고 전했다. 이를 들은 클린턴은 방북 결심을 굳히며 미 정부에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후 방북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연방항공청(FAA)은 미국 국적기가 북한에 착륙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 규정을 풀기 위해 FAA와 미 국무부 고위 라인 간에 신속한 협의가 이뤄졌다. 각종 허가를 비롯해 적성국 비행 준비를 하는 데 나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빙의 비행기를 관리하는 ‘애브제트’의 마크 풀크러드 회장은 “정부 당국과 사전 조율이 없었다면 준비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은 클린턴 경호를 위해 경호실 요원들을 제공했다. 군도 동참했다. 미 공군은 비행기가 북한에 갈 때는 알래스카 엘멘도르프 기지와 일본 미자와(三澤) 기지에, 귀국할 때는 미자와 기지에 착륙해 급유받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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