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매도도 말고 열광도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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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멀게 느껴지는 것은 임진왜란과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도 원인이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일본을 잘 모른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획일적으로만 평가하려 한다.

일본 대중문화도 때로는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획일적인 잣대로만 평가되는 부분이 있다.

"두렵다, 두렵지 않다" "문제가 많다, 문제가 없다" 라는 한마디로 결론을 지으려 한다.

일본 대중문화는 다양하다.

장르와 소재가 다양하다는 횡적 다양성은 물론 세계적 수준이라는 고품위 작품에서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의 저질 상품에 이르는 종적 다양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중 어떤 것을 더욱 많이 수용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문제다.

따라서 "문제가 있으므로 두렵다" 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국민에 대한 모독에 해당한다.

일본문화는 저질이기 때문에 한국을 휩쓸며 국민 정서를 해칠 것이라는 우려는 뒤집어 보면 우리 국민이 저질문화에 열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지적 수준은 이미 충분히 높다.

문제가 있는 것은 배제하고 문제가 없는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남은 문제는 '두려운 것인가 아닌가' 라는 점이다.

개방이 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의무적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소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지선다였던 선택지가 오지선다로 바뀌는 식으로 문화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는 것이다.

문화 선택권이 늘어날수록 국민의 즐길 권리가 보장되고 생활은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문화임과 동시에 산업이다.

이번 개방은 우리 문화시장의 일부를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

"두렵다, 두렵지 않다" 의 논의는 다분히 산업적인 측면의 것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일본 대중문화는 우리보다 훨씬 수준이 높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일 수 있다.

만화와 전자오락은 이미 세계를 제패했고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와 한판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점이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들자면 '일상' 을 강조한 테마라고 하겠다.

현실과 동떨어진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공감하며 자기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는 테마와 메시지를 갖추고 있다.

이는 영웅이 등장하는 동화적 스토리나 무조건 사람을 웃기는 개그가 대부분인 미국 대중문화의 대안 (代案) 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미국 대중문화보다는 한국 대중문화와 충돌하는 측면이 강하다.

자칫하면 우리 문화업계의 기반을 흔드는 '두려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특히 현재 한국에 만연해 있는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과대평가' 와 '거품현상' 을 조속히 제거하지 않으면 필요 이상의 시장을 내주고 귀중한 외화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일본 만화와 전자오락은 세계적인 것이지만 일본 대중음악과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대중음악은 동남아시장에 극히 일부가 진출한 것에 불과하고 일반 극영화는 지난해 해외영화제에서 연달아 대상 (大賞) 을 수상했지만 일본 내에서도 기적 같은 일로 여기고 있다.

더욱이 상업적으로 외국에서 성공한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잘 안 보는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는 예술영화처럼 인식되며 대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지금 보면 단지 낡은 기법의 졸린 흑백영화에 지나지 않는 고 (故) 구로사와 아키라 (黑澤明) 감독의 영화까지도 필수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로 인식돼 있다.

일본 록그룹 'X - 재팬' 이 국내에 30만명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 근거로 그들의 음반이 30만장 정도 팔렸다는 점을 드는데, 한 사람이 여러 장을 샀다는 점은 왜 무시하는 것일까.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점을 일본의 업계가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국의 '거품현상' 을 이용해 수출가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고, 우리 업계는 끌려 가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일본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공정함이다.

무조건 저질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편견 (偏見) 이나, 모든 것이 수준이 높고 한국에서 통용될 것이라는 '과대평가' 는 버려야 한다.

김지룡(일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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