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는 터미네이터, 떠나야 하는 도요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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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폐쇄될 운명에 처한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몬트의 도요타 누미 공장. 23일 이곳에서 생산된 소형 트럭들이 주차장에 늘어서 있다.[블룸버그]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몬트의 도요타 공장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정확한 명칭은 '뉴 유나이티드 모토 매뉴팩쳐링(New United Motor Manufacturing)', 줄여서 '누미(Nummi)'라고도 한다. 제너럴 모터스(GM)와의 50대 50 합작으로 세워졌다.

73년 전 설립된 이 공장은 1982년까지 GM이 단독으로 운영했다. 그러다 84년 도요타가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하며 공동 주인이 됐다. 당시 언론은 이 공장이 "미·일 협력의 상징"이라고 비중있게 보도했다. 심각한 무역 불균형 탓에 마찰을 빚고 있던 터라 이젠 두 나라가 상생의 길을 모색하게 됐다는 의미 부여를 한 것이다.

이 공장은 미국 자동차 산업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도요타의 트레이드마크인 '저스트-인-타임(Just-In-Time)' 생산방식이 이곳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팀워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일본식 생산방식은 미국 업계에 충격이었다. GM을 비롯해 크라이슬러·포드 등 대부분 미국 업체들이 이 생산방식을 속속 도입했다.

그런 누미 공장이 조만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등 외신은 도요타자동차는 누미 공장을 청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25일 보도했다. 파산보호 절차를 거친 GM이 이 공장에서 손을 떼기로 하자, 도요타 역시 단독으로 운영하긴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도요타는 다음 주 GM의 사업 청산을 진행하고 있는 회사에 이같은 내용을 정식 통보할 예정이다.

이 공장에선 매해 42만대의 승용차와 소형 트럭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판매 부진으로 북미지역 생산이 감소함에 따라 도요타는 이 공장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최종적으로는 폐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 공장이 문을 닫으면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비단 상징적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캘리포니아 전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기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4700여 명, 이 공장과 직접 연결된 협력업체만 1000곳에 이른다. 따라서 실질적으론 약 3만 명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것으로 보인다.(East Bay Economic Development Alliance 집계)

그러다 보니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게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그렇지 않아도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미 공장 폐쇄는 '엎친 데 덮친' 재앙이기 때문이다. 25일 교도(共同)통신은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에게 공장 존속을 요구하는 서한을 16일 보냈다고 보도했다. "누미 공장은 1984년 생산을 시작한 이래 캘리포니아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성공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도요타와 함께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주지사실에 따르면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주의회와 관계 자치단체들로 구성된 별도 기관을 발족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에도 지원사격을 요청한 상태다.

사실 도요타 입장에서도 공장 폐쇄가 내키는 일은 아니다. 1950년 이래로 도요타가 주력 차량조립공장을 폐쇄하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원을 자르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도요타의 대표 철학인 '카이젠(Kaizen·改善)'은 안정된 고용이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근로자들이 '괜히 경영 효율화 아이디어를 냈다가 감원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되면 '카이젠'을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미국 내 도요타 판매량이 지난해 15% 준 데 이어 올해는 무려 38%나 감소할 전망이다. 3월 마친 지난 회기연도 동안 46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 미국 내 생산 전략을 확 뜯어고쳐야 하는 상황이다.

캘리포니아라는 위치 자체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인건비가 비싼데다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입김도 거세기 때문이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환경규제도 제조업체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NYT는 "경기가 어떻든 간에 생산 공장과 정규직원을 거들지 않는 게 도요타의 거의 신앙과 같았기 때문에 앞으로 도요타의 전략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UBS 일본 도쿄지사의 타츠오 요시다 애널리스트는 이번 공장 폐쇄 결정을 두고 "이제 도요타의 새 시대가 열린 셈"이라고 분석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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