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관전기]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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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서봉수9단이 일본의 노장 가토 마사오 (加藤正夫) 9단에게 패배한 것은 승부세계의 법칙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52세의 가토는 70년대가 그의 전성시대였고 79년엔 본인방등 5관왕에 올랐다가 조치훈9단이 등장하면서 내리막 길을 걸었다.

서9단은 93년에 세계대회서 우승하고 지난해엔 진로배9연승의 신화를 이루었으니 이 모든게 아직 생생하기 그지없다.

이후 급전직하의 슬럼프에 빠져들었다고는 하나 어찌 가토처럼 흘러간 인물에게 질 수 있단 말인가.

가토는 지난해 요다 노리모토 (依田紀基) 9단에게서 일본랭킹 4위의 '10단' 을 뺏는등 일시적일지 모르지만 다시 살아나고 있다.

승부세계에서의 이같은 부활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무슨 조화냐고 일본측에 물으니까 "가토는 바둑공부와 대국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 이라고 알려준다.

문득 "대국이 고통스럽다. 체력이 떨어져 요즘은 더욱 힘들다" 던 서9단의 말이 생각난다. 대국 때 느끼는 고통과 행복, 승부는 혹시 거기서 갈라졌던 것은 아닐까. 한국은 지난해 이대회서 4강까지 진출했던 김승준6단이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覺) 9단에게 패했고 최명훈6단도 마샤오춘 (馬曉春) 9단에게 무너졌다.

마샤오춘은 강자다.

이창호9단과의 악연으로 10연패를 당하면서 마음이 갈갈이 찢어졌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바둑의 궁극에 한발을 들여놓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언제나 한잔 술을 마다하지 않는 고바야시도 상당한 고수다.

최명훈도 강하지만 마샤오춘에겐 어딘지 희미하게 밀리는 느낌이다.

그 차이를 칫수로 잰다면 1집 정도일까. 적어도 이곳에 모인 세계강자들은 누가 누구와 두더라도 정선 (定先) 을 접을 수는 없다.

1집이나 2집, 많아야 3집이지 5집반의 차이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미세한 차이가 두터운 층을 이루어나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게 바둑의 세계다.

그 1, 2집의 차이는 솜털처럼 가벼워보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날 아침 문득 깨달음으로 다가와 번쩍 눈을 뜨게 만든다.

목진석4단이 중국의 1인자 창하오 (常昊) 8단을 시종일관 몰아붙여 낙승을 거두면서 한국 진영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한국의 신인왕이 이창호9단 다음으로 주목되던 창하오를 꺾은 것은 최대의 이변이자 쾌거였다.

곧이어 조훈현9단이 고전 끝에 중국 6소룡의 1인인 샤오웨이강 (邵瑋剛) 8단을 물리쳤고 안조영4단도 73세의 거목 후지사와 슈코 (藤澤秀行) 9단을 꺾었다.

대국이 모두 끝나고 어둠이 내리는데 허리가 굽은 후지사와는 대국장을 떠나기 싫은듯 안4단과 복기를 계속했고 많은 기사들이 그 주위를 구름같이 에워쌌다.

늙은 후지사와한테서 이미 배울 기술은 없었다.

그들이 에워싼 것은 단지 일생을 허심 (虛心) 으로 살아온 괴물 승부사 후지사와에 대한 존경과 경배의 표시였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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