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결국 민간이 해줘야 하는데 … 일자리가 가장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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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취임 초(2~3월)에는 목표가 명확했다. 재정을 최대한 빨리 투입하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가 ‘새마을운동식 양적 성장’이었다면 이제는 ‘질적 성장’을 해야 하는데 이게 영 쉽지 않다.”

취임 6개월로 접어든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토로다. 지표상으로 윤 장관의 성적표는 나쁘지 않다.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1%로 플러스로 돌아섰고,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2분기 성장률을 2%대로 예상하고 있다. 금융시장도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되찾았다. 분명 바닥을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윤 장관은 측근들에게 “요즘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호소하고 있다. 고민은 지표 뒤에 감춰져 있는 우리 경제의 실상 때문이다. 1분기에는 재정지출 확대로 성장률(전년동기 대비)을 1.9%포인트 끌어올리며 민간 부문의 마이너스 성장(-6.2%)을 일부나마 상쇄했다. 2분기엔 세제 지원에 힘입은 자동차 판매 증대 효과가 성장률을 전분기 대비 0.5%포인트 높인 것으로 추산된다.

재정지출 확대와 감세의 힘인데, 언제까지 계속 재정을 쏟아부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일자리만 해도 6월에 4000개가 늘었지만, 희망근로로 만들어진 일자리 25만3000개를 빼면 여전히 부진하다.

윤 장관의 고민은 12월 이후 우리 경제가 직면하는 상황이다. 경기를 떠받치고 있는 재정 투입도, 희망근로도 11월이면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대책이 마땅치 않다. 그는 요즘 사석에서 “뭐니 뭐니 해도 일자리가 가장 걱정이다. 그런데 고용도, 투자도 정부가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은 민간이 나서줘야 한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한다. 경기 회복의 불씨를 이어가자면 민간이 바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적은 신통치가 않다. 급기야 15일 위기관리대책회의 때는 “신차 구입 때 세금 감면을 해줬으니 자동차 업계도 상응하는 움직임을 해줘야 한다”는 엄포까지 놨다. 사정이 이런데도 시중에선 경기회복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금리 조기 인상, 주택대출규제 전국 확대 등 출구전략을 촉구하고 있다.

또 다른 고민은 ‘감세’다. 윤 장관은 이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다. 핵심은 소득세·법인세를 예정대로 인하하는 것을 비롯해 현 정부의 감세 정책을 고수할 것인가다. 내년엔 소득세 과세표준 8800만원 초과 구간에 대한 세율 인하(35→33%)와 법인세 과표 2억원 초과 구간에 대한 세율 인하(22→20%)가 예정돼 있다.

경기부양을 위해 막대한 돈을 쓴 탓에 나라 곳간 사정이 갑자기 나빠진 것이 발목을 잡고 있다. 올해 재정수지는 51조원 적자, 국가채무는 366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민주당과 일부 학계에선 재정건전성이 악화되고 있는 마당에 부자 감세에 매달린다고 비판한다. 윤 장관은 “감세 유예와 시행 모두 장단점이 있다. 감세를 시행하면 국제적 신뢰가 유지될 수 있고 정책 일관성을 살릴 수 있다. 대신 유예하면 이 어려운 때에 세수를 수조원 더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양쪽이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식의 모순된 입장을 취하는 데서 그의 고민을 찾을 수 있다. 현 정부의 감세 기조를 이탈할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재정건전성 문제를 마냥 외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중도강화론’과 한나라당의 ‘친서민’ 기조도 윤 장관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감세 계획은 손대지 말라면서도 담배세 같은 새로운 세원 발굴은 ‘서민 증세’라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가운데 윤 장관은 경기회복과 재정건전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사실 윤 장관의 두 가지 고민인 ‘12월 이후 한국 경제의 진로’와 ‘감세’는 서로 연관돼 있다. 앞으로 민간 투자와 소비가 살아난다면 정부가 더 이상 재정을 쏟아붓지 않아도 된다. 자연스레 세수도 늘어나면서 재정건전성 걱정을 덜 수 있다. 금리인상과 같은 출구전략 시행도 수월해진다. 하지만 민간의 자생력 회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재정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그럴수록 재정 건전화 논란 역시 커질 것이다. 윤 장관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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