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번의 ‘그러나’ … 불편한 진실과 화해를 함께 말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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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05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4일 카이로 대학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의혹과 불화의 악순환은 반드시 종식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AP=연합뉴스

“링컨은 우리에게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 신념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한 말이다.

이슬람 사로잡은 오바마 수사법

최근 오바마는 연설로 15억 이슬람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4일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미국과 이슬람의 화해를 역설했다. 6000단어로 된 연설을 한 시간여 하는 동안 그는 40차례 이상 박수를 받았다.

평화에서 시작해 평화로 끝난 연설이었다. 연설 서두에 “아살라무 알레이쿰(모든 이에게 평화를)”라고 청중에게 인사했고, 연설의 끝은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로 마무리했다. 연설 중 평화를 28회 거론했다. ‘이슬람=테러’라는 등식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그는 테러·테러범이라는 말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3월부터 대(對)테러 전쟁 을 공식 용어에서 제외했다.

오바마의 연설은 7일 레바논 선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이란과 시리아의 후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 등 야권 동맹의 승리가 예상됐으나 미국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친서방 여권이 이긴 것이다. ‘오바마 효과’가 12일 이란 선거에까지 이어질지 세계가 주목했으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부정선거 논란 속에 재선에 성공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오바마가 “전임자들과 달리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고 있다”며 환영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드 마샤알은 미국과 조건 없는 대화를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이클 벤아리라는 이스라엘의 극우파 정치인은 “친이슬람 성향인 오바마는 이스라엘을 증오하기 때문에 지극히 위험한 연설을 했다”고 분노하기도 했다. 과격 이슬람주의 세력은 ‘오바마에게 속아선 안 된다’고 경계했다. 오바마 수사(修辭)가 이슬람 세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방증하는 반응이다.

차이점보다 공통점 강조
오바마 수사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번 연설에서도 오바마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무함마드가 하늘로 올라가 모세와 예수와 함께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하며 “이스라의 이야기처럼 모세, 예수, 무함마드가 기도로써 함께할 그날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오바마는 3대 일신교가 모두 평화의 종교라는 것도 강조했다. 그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 인류여!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였고 너희로 하여금 족속을 삼아 서로 간에 알 수 있도록 하였도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토라(Torah)는 평화 증진의 목적을 위함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

오바마는 그러나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불편한 진실을 거론하고 이를 공론화한다. 무슬림 청중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었지만 그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한 유대 관계는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 유대 관계는 결코 깨질 수 없습니다”라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오바마가 불편한 진실을 거론하거나 문제의 여러 측면을 지적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러나(but) 화법’이다. AP 통신의 낸시 베낙은 오바마가 이번 연설에서 ‘그러나’를 37회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는 연설에서 예컨대 이렇게 사용됐다. “9·11은 미국에 큰 외상을 입혔습니다. 그로 인한 공포와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국가적 전통과 이상에 반해 행동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오바마 연설의 힘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인터뷰하는 오바마의 모습은 그가 달변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풍부한 신체 언어를 구사하며 글을 자연스럽게 읽는다. 텔레프롬프터를 사용하지만 청중은 그가 자막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는다.

“구체성 없는 말뿐” 비판도
오바마 수사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카이로 연설에 대한 비판 역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미 국방부 차관(2001~2005)을 지낸 더글러스 페이스는 이번 연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폭력을 포기해야 한다” “아랍 국가들은 그들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등 “…해야 한다(must)”로 가득 찬 연설이었다고 혹평했다. “해야 한다”가 30번 이상 사용됐다는 것이다. “수사를 거둬 내고 보면 결국 오바마의 중동정책은 부시와 다른 게 없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그러나 구체성이 없는 것도 오바마의 화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뉴요커’의 조지 패커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오바마의 뉴햄프셔 연설을 들었다. 솔직히 오바마가 한 말은 기억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순수한 형태의 어떤 느낌으로 바뀌었고, 그 느낌은 한동안 나를 맴돌았다.”

오바마 수사가 지니는 힘에 대해 반대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칼 로브는 4일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에서 오바마가 ‘정치적 수사로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바마의 수사 뒤에는 ‘정치인 오바마’가 있다.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식에 가던 길에 “편협성, 인색한 사고, 이념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새로운 독립선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파적 이해의 초월을 주장하지만 상원의원으로 재직할 때도 일관성 있게 리버럴한 투표 성향을 보였다는 게 지난 대선 과정에서 지적되기도 했다.

오바마는 적응이 빠르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이미 수사가 ‘선거 수사(campaign rhetoric)’에서 ‘대통령의 수사(presidential rhetoric)’ 로 바뀌며 보수화됐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현실적이지 못한 공약은 대통령 취임 후에는 과감하게 폐기 처분해 ‘말 바꾸기’ 논란도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번 연설로 ‘오바마 독트린’이 탄생했다고 분석한다. 그 골자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오바마는 4월 19일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에 가르치려고 드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고 미국의 적들에게 손을 내밀면 미국은 강해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오바마의 수사는 그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시키고 있다. 그는 북한에도 손을 내밀 것이다. 그의 수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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