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업의 모델이 된 데 보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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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세실의 이원규 대표는 위기상황에서 전혀 뜻밖의 선택을 했다. 목재를 수입하다가 천적을 생산하자고 하니 50여 명의 직원 대부분이 짐을 쌌다. 하지만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Q&A 이원규 대표 “천적산업은 연구와 현장검증의 산물”

수많은 자료 검토와 현장검증 과정을 통해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논산육군훈련소 사격음이 간간이 들려오는 논산 연무읍 본사에서 박성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가 이 대표를 만났다.

목재 수입과 천적 생산은 전혀 다른 분야 아닌가?
외환위기를 어렵게 빠져나오면서 일에 회의가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억울했다. 1년에 200일 이상을 해외출장에서 보냈는데 환율에 맥없이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때 든 생각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였다. 미래가 없는 목재 수입을 접기로 하니 농산물 수출과 천적 생산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 꼭 집어 말은 못해도 되는 사업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예감을 어떻게 확신으로 이끌었나?
길을 찾고자 많은 자료를 뒤졌다. 원래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살펴보니 전 세계 곤충 관련 주요 논문이 600편에 달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섭렵하면서 곤충을 배워갔다. 시대 흐름도 읽어야겠기에 세계 농업 관련 주요 사건과 동향을 챙겼다. 또 농업 선진국을 찾아가 책에서 읽은 내용과 현실을 비교하는 작업도 했다.

위기감을 느낀 때는?
집과 땅, 각종 회원권 등을 다 내놓고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집사람에게 혼도 났다. 목숨을 걸고 하는 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00억원을 투자한 사업의 첫해 매출이 1억9200만원에 그쳤다. 막막했지만 내 선택에 가졌던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불투명한 분야에 큰돈을 쏟아 부으며 승부를 건 이유는 뭔가?
나는 무역으로 잔뼈가 굵었고 돈도 제법 벌었다. 여생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그때 내 나이가 겨우 40대 중반이었다. 이자 수입이나 임대 수입으로 한가하게 살아가기엔 너무 젊었다. 비전 있는 일을 새로 해 보자는 욕구가 더 강했다.

두렵지만 피해선 안 될 게 있었다면?
시행착오였다. 가장 무서웠지만 더없는 보약이기도 했다. 모든 사업이 그렇지만 천적 사업도 시행착오 없이는 발전이 없다. 하지만 당장 몇 개월간의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현실적인 고통이 컸다.

경쟁상대는 누구인가?
네덜란드다. 서양인들의 사고방식과 정서적 배경을 알고자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도 읽었다. 우연의 일치를 하나 찾아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귀양지에서 목민심서를 완성한 때가 1818년이다. 선생은 이 책에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는 곡물 메이저인 벙기가 곡물 무역회사로 첫출발을 했다. 그때 농업과 먹는 것에 대한 인식은 조선이나 네덜란드나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업초기 오해도 있었을 법한데.
외부 지원 없이 내 돈 들여 천적 사업을 한다고 하니 당시 반짝 유행하던 한탕주의 벤처기업인이 아닌가 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만 보던 정부도 요모조모 따져보더니 친환경 농업인으로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이제는 국내 농업인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는 듯해 보람도 느낀다.

앞으로 회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작정인가?
2015년까지 국내 농가 1만 호 이상을 조직화해 농산물 수출 산업을 일으켜 보고 싶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세실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5㏊의 유리온실을 만들어 유기농 토마토를 재배하려고 한다. 그러자면 이 회사도 세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유능한 경영인에게 맡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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