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의 산 역사’ 불황과 함께 사라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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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왜고너 제너럴모터스(GM) 회장이 지난달 17일 미국 디트로이트 본사에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한 뒤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한달 여 만에 그는 회장직을 사퇴했다. [디트로이트 AP=연합뉴스]

‘미국 디트로이트의 산 역사’인 릭 왜고너(56) 제너럴모터스(GM) 회장이 결국 사임키로 했다. 29일(현지시간) AP통신 등 외신은 이날 왜고너가 회장과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으며 후임으로는 현재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프리츠 헨더슨이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그가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의회 등에서 종종 나왔다. 어마어마한 정부 지원금을 받는 만큼 부실경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금융위기 이후 134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GM은 현재 166억 달러를 추가로 요구해놓고 있다.

그의 사퇴는 버락 오바마 정부의 자동차 업계 지원방안 결정을 하루 앞둔 이날 전격 발표됐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한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려 구조조정의 전제조건으로 재무부가 왜고너의 사퇴를 요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수십 억 달러의 세금이 자동차 업계에 또 투입되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이번 조치로 크라이슬러 등 정부 지원에 목을 메고 있는 다른 기업 경영진도 압력을 받게 될 전망이다.

◆왜고너의 세 가지 실책=그는 30여 년 동안 미국 자동차산업의 부흥과 몰락을 한몸에 겪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뒤 1977년 GM에 입사한 그는 브라질·유럽 법인장을 거쳐 2000년 사장 겸 CEO로 임명됐다. 3년 뒤엔 회장을 맡았다. 최근까지도 그는 사퇴 가능성을 일축했다. 지난해 12월 인터뷰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 많은 가치를 더하기 때문에 계속 내 할 일을 할 뿐”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추가 지원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경제전문지 포춘은 이날 인터넷판에서 “1년 전에만 물러났어도 그는 GM의 가장 훌륭한 리더로 기억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실책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휘발유 값 급등과 경기 침체를 예상하지 못한 채 차 값이 비싸고 연비가 나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트럭 판매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둘째, GM이라는 낡은 브랜드에 집착해 새 이미지를 만드는 데 게을렀다. 셋째, 내부 인력에 지나치게 의지하다 ‘새 피’를 수혈하는 문화를 만들지 못한 것도 그의 실책으로 지적된다.

◆정부 지원 불투명=왜고너의 사퇴에도 GM에 대한 정부의 추가 지원은 불투명하다. GM과 크라이슬러가 제출한 구조조정계획서 내용이 수십억 달러의 추가 지원을 허락하기엔 미흡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는 GM에 60일 안에 추가 비용절감 계획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크라이슬러에 대해선 다음 달 말까지 이탈리아 자동차업체 피아트와의 제휴 협상을 마무리하라고 촉구했다.

AP는 이날 경영진은 물론 노동자·채권단·주주도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어느 회사든 파산하게 놔둘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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