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통화위기 신뢰로 풀어야"…미국 하버드대 제프리 삭스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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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근의 동남아 통화위기는 분명 각국의 경제 정책을 다시 돌아보게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미 하버드대의 아시아 경제통인 제프리 삭스 교수는 최근의 동남아 통화위기를 '정책 실패' 보다는 '자본 이동' 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아시아개발은행 (ADB) 이 29일 (현지 시간) 워싱턴에서 연 '부상하는 아시아 - 변화와 도전' 연구보고서 발간 기념 학술 토론회에 참석, "현재의 위기 상황은 각국 정부의 책임이라기 보다 민간자본의 과다한 유출입 때문" 이라며 "지금 필요한 처방은 '신뢰 구축' 이지 '몰아 붙이기' 가 아니다" 고 주장했다.

사토 미쓰오 ADB 총재가 사회를 본 이날 토론회에는 사공일 (司空壹) 전 재무장관과 수파차이 파니치팍디 전 태국부총리.비쉬나드 데사이 ADB 수석연구위원등이 참석했다.

다음은 삭스 교수의 발표 요지. "동남아 경제가 통화가치.주가 하락등으로 혼란에 빠져있는 지금 아시아 경제의 장기 전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예컨대 다음 달의 아시아 경제 상황을 예측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다.

장기 전망에 비해 단기 예측이 얼마나 변덕스러운가를 알기 위해 최근 무디스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S&P) 등 신용평가기관들이 아시아 각국 경제에 대해 내렸던 평가결과를 한번 보자. S&P는 올 6월 24일 태국.인도네시아등 거의 모든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안정적 (stable) 상태' 란 판정을 내렸었다.

그러던 것이 10월 27일자 평가에서는 보다시피 모두 다 '부정적 (negative) 상태' 로 바뀌었다.

단 몇달사이에 한 국가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최근의 시장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경제의 장기 전망은 여전히 밝다.

95년부터 2025년까지 30년간 동아시아 지역의 성장은 지난 30년 (65~95년)에 비해 비록 둔화되겠지만 이는 선진경제권에 진입하거나 근접하는 결과 예상되는 당연한 현상이며 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오히려 더 높은 성장이 기대된다.

아시아 경제권은 ▶선진국들을 따라 잡기 위한 성장 전략 ▶개방지향.흑자재정.정부효율등의 경제 정책 ▶인구구성상의 활력 ▶태평양을 낀 지리적 이점등을 바탕으로 성장을 구가해왔다.

이러한 조건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법에 의한 제도와 규칙의 확립, 금융시장의 효율적 관리등이 중요한 과제지만 이들은 얼마든지 자체 노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아시아 주요국의 거시경제정책은 여전히 건전하다.

그런데도 최근 동남아시아에 금융위기가 닥친 것은 미국 정부와 국제금융기구등이 이들의 개방을 지나치게 밀어부친 결과다.

예컨대 과다한 해외 차입이 문제가 됐지만 그 과정에서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각국 정부가 아니라 외국 금융자본들이었고 동남아 각국이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을 받아 들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따라서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간자본의 과다한 유입과 이탈 상황은 잘못된 국내 정책에서 비롯된 위기가 아니라 민간 자본들의 책임이다.

물론 동남아 국가들은 효율적인 금융감독체계등을 강화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러나 지금 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처방은 '신뢰 구축' 이지 거시정책.금융감독체계등의 '밀어 부치기' 가 아니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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