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장원-파마, 중국집-자장면 … 원하는 대로 척척 ‘맞춤 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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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청담동 박준뷰티랩 본점에서 박준 원장(右)이 청각장애인 이용선씨의 머리카락 상태를 보고 있다. 오현정 청음회관 사회복지사(左)가 수화로 통역했다. [안재흥 인턴기자]

 17일 오전 10시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박준뷰티랩 본점. 통유리창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주부 이용선(40·동작구 상도동)씨는 화려한 인테리어가 낯선 듯 연방 두리번거렸다. 얼굴에는 긴장한 빛도 역력했다. 옆에서는 오현정 청음회관 사회복지사가 수화로 “편안하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듣지 못하는 이씨는 청각장애인 복지관인 청음회관을 자주 이용한다. 오 복지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고급 미용실에 와서인지 많이 긴장한 것 같다”고 했다.

잠시 뒤 유명 헤어디자이너인 박준(57) 원장이 나와 인사를 나눴다. 오 복지사가 수화로 통역을 했다. “어떤 스타일이 좋으세요?”(박 원장) “알아서 편하고 예쁘게 해주세요.”(이씨)

박 원장은 매직스트레이트에 볼륨감을 주는 40만원짜리 볼륨매직 파마를 시작했다. 박 원장은 평소 연예인·CEO를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세 차례만 예약을 받아 머리를 해준다.

이씨는 그동안 변변한 동네 미용실에도 가본 적이 없다. 이씨의 남편도 청각장애인으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그러나 10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는 거동이 불편해 누워만 있다. 딸(16)도 청각장애인이다. 주민자치센터에서 한 달에 100만원가량 보조금을 받지만 남편 약값과 생활비로도 모자란다. 동네 미용실이라도 4만~5만원은 줘야 하는 파마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씨가 최고급 파마를 하게 된 것은 서울시복지재단의 ‘서울디딤돌 사업’ 덕분이다. 지난달 14일 언니를 안쓰럽게 생각한 여동생이 청음회관에 “언니에게 한 번이라도 여자로서의 삶을 누리게 해주고 싶다”며 미용 서비스를 신청했다. 청음회관이 복지재단에 연락해 박 원장의 최고급 미용 서비스를 받게 된 것이다. 박 원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미용실로 청각장애인을 초청해 머리를 해준다. 이씨를 포함해 4명이 이 서비스를 받았다.

박 원장은 “나도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해서 미용으로라도 남을 도우려 한다”며 “이왕이면 미용실로 초청해 머리를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용 서비스를 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2시간여가 지나고 파마가 끝나자 거울을 통해 확연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이씨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 복지사를 통해 “너무 예쁘다. 너무 감사하다”며 박 원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580여 업체 참여=그동안 복지 서비스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받는 게 보통이었다. 다른 지역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가 있어도 이용하기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서울디딤돌사업’이다.

일반인이나 기업이 서비스나 물품을 기부하면 이를 통합 관리해 저소득층이 필요로 할 때 지역에 상관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것이다. 시내 사회복지관·노인복지관·지역아동센터 등 100개 거점기관에 신청하면 사회복지사가 적절한 서비스를 주선해준다.

현재 각종 서비스를 기부하는 업체는 580여 곳이다. 동네 자장면 집에서부터 패밀리레스토랑·이삿짐 업체까지 다양하다. 장애인과 노인·기초생활수급자 등 사회적 약자 7300여 명이 이용했고 이들 서비스를 가격으로 따지면 2억3700만원 정도다.

노원구 월계동에 사는 독거노인 정방희(77) 할머니는 지난달 이웃한 강북구 미아동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난생처음 스테이크를 먹어 봤다. 정 할머니는 “너무 오랜만에 맛있는 고기를 먹어 보니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서울시복지재단은 디딤돌사업을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검색해 직접 신청할 수 있도록 바꿀 계획이다. 인터넷 사용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은 사회복지관에 전화로 신청해도 된다. 송성숙 서울시복지재단 사업지원부장은 “올 하반기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날에, 원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택 기자 , 사진=안재흥 인턴기자



“기부 소외지역도 서비스 고루 가게 하려고 착안”

복지재단 이성규 대표

 디딤돌사업을 고안한 서울시복지재단 이성규(서울시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사진) 대표는 “중국음식점에서 돈은 내기 어려워도 한 달에 자장면 열 그릇을 기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며 “필요한 사람에게 어떻게 잘 연결해줄까 하는 점에 착안했다”고 말했다.

- 기존의 기부제도와 뭐가 다른가.

“국내에는 지역 복지공동체가 없다. 지역 복지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지만 일손이 부족하다. 또 어떤 지역에는 기부가 몰리고 다른 곳은 기부가 부족해 지역 간 편차가 심하다. 이를 통합해 소외지역에서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기부자와 수혜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생각 못했던 일이 가능해지니 무척 좋아한다. ‘따스한 밥을 언제 먹어 보느냐’고 묻던 아이들이 이웃 동네에서 맛있는 밥을 먹게 됐다. 기부자들 역시 기부가 거창한 게 아니고, 나의 생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사업 계획은.

“노인이나 장애인·저소득층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디딤돌 거점기관을 200여 군데로 늘려 서울 전 지역에서 손쉽게 연결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묶어 전국적인 기부·봉사 네트워크를 만들 계획이다.”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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