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국가 부채 위험수위 …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 재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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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재현되고 있다.”(마이클 왕 모건스탠리 전략분석가)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동유럽이 ‘비우량(Subprime)’ 지역이 되고 있다.”(라시 크리스텐센 덴마크 단스켄뱅크 수석 애널리스트)

동유럽 금융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헝가리·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의 부채가 위험수위에 달하면서 대규모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17일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외신은 동유럽에서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으로 막대한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으며 금융위기로 이어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폴란드·체코 등 주요국 통화가치가 잇따라 급락한 데다 최근 러시아 정부가 4000억 달러에 달하는 민간 부문 채무 상환을 연기하면서 디폴트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유럽 국가의 통화는 일제히 사상 최저 수준까지 하락했다. 폴란드 즈워티화는 이날 유로화에 대해 1.8% 하락한 4.9307즈워티로 2004년 3월의 최저치 수준에 근접했다.

그동안 동유럽 금융시장에 대한 경고와 우려는 계속 제기돼왔다. 지난해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라트비아·헝가리·우크라이나 등은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았다. 불가리아·루마니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도 조만간 자금 지원을 신청할 전망이다.


그러다 17일 동유럽 시장의 위험성을 경고한 무디스 등 신용평가사의 보고서가 나오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이날 동유럽 은행들에 대한 신용등급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동유럽의 문제는 동유럽에만 그치지 않는다.

무디스는 동유럽 은행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서유럽 금융회사의 신용등급마저 영향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은행은 오스트리아의 라이프아젠 첸트랄방크, 프랑스의 소시에테 제네랄, 스웨덴의 스웨드방크 등 서유럽 금융회사의 자회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무디스에 따르면 이들 동유럽 은행의 총 부채규모는 1조5000억 달러 이상이며 이 가운데 90% 정도가 서유럽 등 해외에서 유입된 자금이다.

결국 시장에선 동유럽발 금융위기가 유럽 전역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달러에 대한 유로화 가치도 떨어지고 있다. 17일 유럽 증시의 주가도 2.4~3.4%씩 하락했다. 외신들은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랬듯 동유럽발 금융위기로 인한 피해가 선진국 시장을 거쳐 아시아 신흥시장까지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관계기사 e6면>

전문가들은 이번 동유럽의 위기가 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와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지나친 성장 위주 정책에 따라 자금을 무분별하게 끌어들였고, 수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점이 당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모건스탠리 분석가 마이클 왕은 “동유럽 국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신흥시장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모습”이라며 “경제 호황기에 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경기 침체가 닥치면서 자금이 빠져나가자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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