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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만든 한은 - 경찰 모조 지폐 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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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수사용 모조 지폐’ 7000만원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경찰의 모조 지폐를 갖고 종적을 감췄던 제과점 여주인 납치범 정모(32)씨가 중고 오토바이 구입에 700만원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우려가 현실화한 마당에도 담당 기관인 경찰과 한국은행은 공을 떠넘기는 데만 급급하다.

티격태격하는 부분은 모조 지폐 제작 경위. 경찰청은 “2005년 모조 지폐 12억원을 처음 제작했을 때 한은에 공문을 보내 자문을 했고 ‘유통시킬 목적이 아니라면 사용해도 좋다’는 답신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전혀 모르는 일로 경찰이 금융당국 자문 없이 단독으로 만든 것 같다”는 입장이다. 같은 사실을 놓고 서로 상반된 ‘기억’을 말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을 연상시킨다.

한은의 말대로라면 경찰은 ‘화폐 위조범’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은 관계자는 “경위를 파악하는 대로 금융당국이 경고·주의를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경찰 말이 사실이라면 한은은 기억력이 나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두 기관 모두 발을 빼기 힘든 상황이다. 경찰은 모조 지폐가 시중에 유통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지만 첫 수사 브리핑 때부터 “일반인도 식별이 가능할 만큼 조잡한 수준”이라며 ‘정교한 모조 지폐’임을 감추려 했다. 그러다 본지 보도가 나온 다음에야 마지못해 사실을 인정했다.

한은도 마찬가지다. 한은이 밝힌 대로 수사용 모조 지폐가 만들어진 것을 몰랐다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무능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그로 인해 시장이 교란될 위험성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다. 그런데도 대책 마련은 소홀히 한 채 “내 손은 깨끗하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경찰과 한은 사이에 엇갈린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모조 지폐가 결국 유통되고 말았다. 한은은 “위조 지폐 사용에 따른 재산상 손해나 형사적 책임은 개인이 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돈을 손에 쥐게 된 시민은 선의의 피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두 기관은 ‘책임 미루기’ 공방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당장 나서야 한다.

이진주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