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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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열아홉이나 갓스물이라면 또 모르까,하영의 나이 어느덧 서른셋이었다.내가 그녀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기 시작한 건 삼년 전,캐리어 우먼들의 망년 모임에 초대를 받은 직후부터였다.나는 여자를 쉽게 사귀지 못하지만,쉽게 사귀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눈길을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그러니까 허투루 여자를 사귀고,배설적인 욕망을 구사하고,순간적인 외로움을 모면하기보다는 차라리 혼자인 상태를 견디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온 것이었다.요컨대 자신을 사로잡는 필연성이 없는 사랑,그것은 연출과 연기로 유지되는 무대 위의 사랑과 조금도 다를게 없을 터였다.

그날 망년 모임에서 내가 하영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대단히 특이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목까지 올라오는 지퍼가 달린 우유빛 티셔츠와 여러 가지 빛깔이 오묘하게 뒤섞여 진주빛을 내는 짤막한 트렌치 코트 차림의 그녀가 칵테일 잔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을 때,그녀의 전체적인 외관을 보며 나는 얼핏 만화의 주인공을 연상했었다.심술궂은 마녀가 사는 마법의 성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시간의 비밀이 아로 새겨진 흑수정을 찾아오는 지혜로운 성주의 딸. 그녀는 명동에서'윤하영 부티크'를 경영하는 의상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그리고 내가 소설가 이본오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과'불나방 관찰일지'라는 장편소설을 인상 깊게 읽었다는 말을 덧붙였다.그래서 그러냐고,늘 그러듯이 나는 어설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그 다음 순간,그때까지와는 아주 다른 표정으로 그녀는 내게 엉뚱한 질문을 건넸다.

“지금 여기 분위기가 편안하게 느껴지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나서 나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이 여자가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게로구나,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화려한 장식등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빛과 은은한 실내악의 선율,그리고 이리저리 오가며 대화의 상대를 바꿔 나가는 자신감에 찬 사람들의 표정… 이런 걸 편안한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글쎄요,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편안하다는 느낌보다 화려하다는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드는군요.” 이목구비,그녀의 얼굴에 담겨 있는 부드러운 곡선이 깊은 안정감을 조성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저는 재단이 잘못된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이런 자리가 원래 부자연스러운 건지,아니면 이런 자리를 부자연스러워 하는 제 자신이 부자연스러운 건지를 잘 모르겠어요.아무렇든 저는 자연스럽고 편안하지 않은 걸 잘 못 견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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