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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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오기욱과 나는 우동을 먹고 맞은편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밝은 햇살이 밀려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화단에 피어난 철쭉과 연산홍이 보란 듯이 시선을 사로잡았다.한동안 그와 나는 말없이 화단을 내다보았다.나도 기분이 그리 유쾌한 편은 아니었지만,오늘따라 그는 무척이나 우울한 심사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외로운 건가? 오기욱이 15층의 내 거처로 직접 올라온 것만 보아도 심상(尋常)한 상태가 아니란건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같은

건물에 산다고는 해도,그와 나는 서로의

사생활을 무시하면서까지 친분을 우선시하는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뭐랄까,서로에게 정신적으로 부담스런 존재가 되지 않으려는 깔끔한 이기주의같은 것이 그와 나 사이에 묵계적으로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형은 혹시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문득 창에서 시선을 거두며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이?”“그래요,아이.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아주 간절하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니체 식으로 말해 나의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말예요.”“글쎄,뜻밖의 얘기로군 그런 생각을 전혀 안해본건 아니지만,한번도 결론을 내려 본적은 없었어.아이 문제를 독립시켜서 생각하기도 어렵고,천상 결혼과 결부된 문제니까 나로서는 결론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지.근데,아이를 낳게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는 다시 결혼할 여자를 찾고 싶다는 의미인가?”

이혼한지 일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결혼 상대를 찾겠다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오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정리한 이후,그는 자신의 이혼에 대해 아주 간단 명료하게 사유를 밝혔었다.결혼의 파탄이 결혼의 허위나 기만보다 낫다고,그때에도 그는 니체를 인용했던 것이다.

“성공에 대한 의지는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쪽이 훨씬 강해요.실패를 해봤기 때문에 더욱 성공하고 싶어지는 거죠.그리고 반드시 그런 이유는 아니라 해도…누군가,적당한 대상이 아니라 필연성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을 지니고 세상의 이치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는 여자…이제 그런

여자는 씨가 말라 버린건가,내 눈에는 세상 여자들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비슷해 보여요.개성이라는 이름의 몰개성으로 여자들이 한심스럽게 평준화되거나 속물스러워진 것 같다구요.” 나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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