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M&A서배운다>1. 힐튼의 對 ITT 선전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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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해외에서는'세기의 세일(sale of the century)'이라고 부를 정도로 90년대의 인수.합병(M&A)은 뜨겁기만 하지만 국내 M&A는 아직 시동도 걸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몇건이 성사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으나 전형적인 M&A라고 할만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머지않아 불어닥칠 태풍에 앞서 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호적.적대적 M&A의 동기,공격및 방어전략,그리고 숨은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지난 1월27일 오후4시20분 ITT 뉴욕 본사에 2쪽짜리 팩스가 날아들었다.'친애하는 랜드'로 시작하는 이 팩스는 힐튼이 ITT에 낸 선전포고였다.힐튼이 제시한 가격은 ITT 주식 1주당 55달러,총 65억달러(5조8천억원)였다. 힐튼이 ITT 공격작전을 개시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1개월간의 도상훈련후 힐튼은 ITT에 합병의사를 타진했으나 ITT의 랜드 아라스코그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ITT로선 우호적 합병기회를 놓친 셈이다.

힐튼의 행보를 단순한 머니게임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힐튼은 세계적인 호텔체인으로 쉐라톤호텔을 가진 ITT와는 상호경쟁하는 입장에 있다.전세계 72개의 호텔을 경영하는 쉐라톤호텔은 힐튼이 약한 유럽에서 특히 지명도가 높다.게다가 ITT에는 카지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시저스가 있다.힐튼과 ITT를 결합할 경우 30개이상의 카지노와 3백개이상의 호텔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호텔.카지노기업이 되는 것이다.ITT의 주가는 43.75달러에서 단번에 58.50달러로 껑충 뛰었고 힐튼의 주가도 15%나 올랐다.

이런 경쟁관계를 떠나 힐튼과 ITT는 이미 맞부딪친 경험이 있다.지난해 6월 발리(카지노)의 인수를 놓고 겨룬 끝에 힐튼이 승리했다.힐튼은 이때 ITT의 진가(眞價)와 약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이유만으로 이 싸움의 결과를 예측하기는 아직 이르다.양사 총수들의 성격.철학.스타일의 충돌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힐튼을 지휘하고 있는 볼렌바흐 회장은 주주를 위해 단 1달러라도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사양하지 않는 인물로 96년 힐튼 회장이 될때까지 15년간 직장을 무려 여섯번 옮긴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95년 디즈니 사장으로 스카우트돼 채 자리잡기도 전에 아이즈너 회장을 설득,ABC-TV를 사들였다.가위 M&A 협상의 귀재라 부를 만하다.

이에 반해 ITT의 아라스코그 회장은 수완가는 아니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79년 회장에 오른뒤 지금까지 외부의 수많은 공격으로부터 ITT를 지켜냈기 때문이다.95년엔 보험.자동차부품사업을 별도 회사로 분리하면서까지 끈질기게 살아남는 비결을 체득한 백전노장이다.

힐튼의 선전포고가 있은지 2주일만에 나온 ITT의 반응은 예상대로'일전불사'였다.동시에 호텔.카지노와 직접 관련없는 사업을 처분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그러나 힐튼의 의지는 확고하다.“호텔과 카지노를 제외한 모든 사업은 어차피 인수후 처분할 계획이므로 ITT의 이런 행동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ITT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권성철 전문위원

<사진설명>

볼렌바흐 힐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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