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외압메모의 해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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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검찰에서 발견됐다는 메모 시비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지고 있다.내용은 ▶전 경제수석과 은행장 사법처리는 안되며 은행장의 경우 불구속입건도 안된다▶검찰도 결국 국가의 일부분이 아니냐▶뜻대로 하려면 총장 등 검찰 수뇌부가 사표를 낸 다음에 하라▶총장님-나도 마음대로 사표를 낼 수 없다▶중수부장-사표내면 혼자 스타가 되겠다는 것인가▶누구보다 검찰을 아끼는 내가 이렇게 얘기할 때는 나를 믿어 보라는 것이 요지다.

모두들 메모의 정체는 무엇이며 누가,언제,어디서,무슨 목적으로 작성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그러므로 메모내용을 중심으로 한가지씩 해독(解讀)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검찰청을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면 메모에 적힌 내용이 검찰 내부갈등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이라는 것과 외부는 바로 청와대라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청와대는 곧 대통령을 뜻한다.아울러 대통령의 뜻은 검사출신인 민정수석비

서관을 통해 검찰에 전달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자연스런 관행이었다.그렇다면 1차로 수사가 뜻대로 되지 않자 청와대에서 별도의 지시를 내린 내용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메모의 문맥으로 보아 작성된 시기는 4월 초순이다.은행장.경제수석에 대해 수사한다던 심재륜(沈在淪)대검 중수부장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4월9일 정치인 수사 착수를 공개선언한 것을 보면 그 직전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같은 중요한 내용의 전달은 검찰의 조직체계로 보아 1대1의 전화통화가 아니고 수뇌부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했을 것이라고 추리해볼 필요가 있다.이 경우 수뇌부는 법무장관.검찰총장.중수부장 등이 해당된다.즉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수뇌부와 한자리에 앉아 한보수사에 대한 대통령의 뜻을 전달한 내용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말썽이 난 후 청와대 민정수석실이“검찰에 이같은 내용의 전화를 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한 것이나 수사 실무책임자인 심재륜 중수부장이“나는 외부와 일절 통화하지 않았으며 메모내용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부인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만나서 얘기한 내용이니 전화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금품수수 혐의를 부인해온 국회의원이 검찰 소환뒤“정태수(鄭泰守)한테서 안 받았다고 했지 언제 한보 돈 안받았다고 했느냐”고 주장한 것처럼 궁색하긴 하지만….

문제는 수뇌부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면 메모는 필요없었다는데 있다.즉 수뇌부중 누가 그 자리에 대리인을 보냈고 그 대리인이 대화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메모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손바닥 크기의 용지에 순서없이 쓴듯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모임 직후 승용차 안 같은 곳에서 급히 작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되면 메모풀기는 거의 끝난 셈이다.종합해 보면 4월초순 청와대 민정수석이 어느 장소에서 법무장관.검찰총장.중수부장 등과 만나 수사대책을 협의하고 청와대의 뜻을 전달한 내용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이 자리를 마다하고 대리참석

시킨 주인공을 점치는 것은 누가 반발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5,6공시절 군사정권때는 대형사건수사에 통치권자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겼었다.어쩌면 지침을 받아 수사하는 것이 체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민정부에서까지 이런 식으로 상의하달(上意下達)이 된다면 큰일이다.지금은 부당한 지시라고 판단되면 검찰도 고개를 가로 젓는 시대다.'누구는 구속하면 안된다'는 식의 지침을 시달한다면 직권남용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현재 수사팀이 겪는 정도의 갈등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앞으로 여야 거물급이 들어 있는 정치인 처벌이나 김현철(金賢哲)씨 처리과정은 더욱 험난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제 메모내용대로 수사가 진행되는지 아니면 검찰권이 제모습을 찾아가는지를 우리 모두가 지켜볼 차례다. 권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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