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기업 회생여부 '法대로' 판단-美 부실기업 처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한보 부도사태는 미국의 대다수 금융인.기업인들에게 큰 의문거리가 되고있다.기업부도라는.경제적'현상이 어째서 한 나라의 정치.사회적 문제가 되느냐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경제행위가 경제적 가치판단에 따라 이뤄지지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큰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파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미 파산연감(96년판)에 따르면 95년도에만 해도 10억달러 이상의 채무를 안고 파산한 기업이 7개나 된다. 예컨대 자산규모가 40억달러가 넘는 다우코닝사의 경우 95년우리로 치면 법정관리에 해당하는 연방파산법 11조 적용을 신청했다.이 회사는 자신들이 제작한 여자들의 유방 확대수술용 실리콘 부조물이 계속 성형수술 부작용을 야기하는 바 람에 손해배상비용을 댈 수가 없어 두 손을 들었다. 텍사스의 유전개발회사인 펜조오일이나유명 백화점체인인 메이시등도 파산으로 법정관리를 받은 바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상당수의 기업들이 파산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의입김이라든가 금융권의 특혜대출이 거론되는등 물의가 빚어진 적은없다. 부도기업을 살릴 것이냐,죽일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일도 없다.이유는 간단하다.모든 것이 정해진 법과 규정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만약 부도(변제 불이행)가 나더라도 정부나 주거래은행이 즉각 개입되지 않는다.이는 어디까지나 채권자와 채무자 쌍방이 법원에서 해결할 민사문제다.채권자는 도저히 못받겠다 싶으면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 되고,채무자는 도저히 줄 수 없다싶으면 파산신청을 하면 된다. 연방파산법은 11조(일단 채권.채무를 동결하고 1백80일 이내에 회사 경영진과 채권인단의 합의로 회사 갱생계획을 제출하는내용)와 7조(갱생을 포기하고 회사의 청산절차를 밟는 내용)로이뤄져 있다. 미국의 대기업이 도산하는 과정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은행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도 않는다.대기업의 경우 은행이 자금조달의 주된 루트가 아니다.특히 장기자금의 경우에는 이자부담이 높은 은행융자 대신 증시를 통해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주식 을 처분하는방법이 주로 활용된다.자본시장이 잘 발달돼있고,기업정보의 투명성.공공성이 확보된데다 신용평가등급제도가 잘 시행되고있는 덕분이다.우리 기업들이 무턱대고 은행돈을 많이 쓰는 것은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이 쉽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파산에 따른 파장이 작은 것은 미국의 경제규모가 크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미국 금융기관들의 엄격한 대출제도 때문이기도 하다.미국 은행들은 기업의 신용등급이나 경영정보를 토대로 일정 한도를 설정,이 범위에서 대출해준다.담보물을 잡을 때에는 동산과 부동산의 비율을 일정하게 하며,시장가를 엄격하게 평가한다.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일절 대출을 안해주므로 특정 기업에.물리는'일이 거의 없다. 특히 80년대 후반 저축대부조합(S&L)들이 과당경쟁으로.거품이 가득낀 가격'으로 부동산 담보 대출을 했다가 줄줄이 망할뻔 한 뒤로 대출관리가 더욱 엄격해졌다. 기업의 다양한 자금조달 방법,금융기관의 엄격한 대출관리와 위험분산기술,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업문제는 채권.채무자간 문제일 뿐이라는 확고한 원칙등이 경제적 문제를 정치.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지지 않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들이다. [뉴욕= 김동균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