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지방에서는

여전히 고압적인 농촌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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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해 12월 발표되었던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첫번째 대상지가 지난 4월 초 36개 권역으로 확정되었다. 경상북도 소재지는 6개 권역이다.

이 사업은 2004년부터 10년간 119조원이 투자될 농업농촌 종합대책이 포괄하는 여러 사업 중 하나다. 이 대책은 말 그대로 종합적이어서 산업으로서의 농업, 농업인의 소득 증대, 삶의 공간으로서 농촌뿐 아니라 농정조직과 관련 예산 및 법령의 정비와 대책을 망라한다.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은 2013년까지 전국 1000개 권역을 대상으로 시행될 계획이고 권역당 3년 동안 70억원을 투자하되 지역여건과 사업계획에 따라 차등 지원될 예정이다.

또한 공모를 통해 선정하고, 사업계획은 지역주민으로부터 상향식으로 개발하게 하며, 주민결의서와 주민동의서를 첨부케 할 뿐만 아니라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현지조사도 거친다.

지금까지의 유사 사업들이 관이나 전문가의 주도 아래 하향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주민은 형식적.소극적 참여에 그쳤던 것과 분명한 선을 긋겠다는 것이다. 선정된 사업도 지속적인 모니터링 결과에 따라 과감하게 지원을 중단할 수도 있다니 지금까지 어르고 달래는 식의 나눠주기 사업이 아님은 분명하다.

사업의 내실을 기하고 지역주민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이 정도의 다양하고 정교한 장치가 마련된 것은 처음인 듯하다.

하지만 천명된 원칙과 의지가 실제로는 반영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향식이고 강제적인 국민동원의 대표주자 격인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최근 한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데, 이 사업의 구체적인 진행에 그때를 회상시키는 단편들이 있어 이를 지적한다.

우선 사업이 강조하는 '지역주민'이 '시장.군수가 구성하는 지역개발협의회'로 설정된 것이 문제다. 지역개발에 자발적으로 나서거나 맨처음 동원되어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흔히 지역의 성장 연합세력이며 이는 협의회가 대표적인 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성장연합 세력의 외양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지역의 관과 가깝고 경제적 부나 사회적 명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실제 사업을 진행할 지역 거주민은 극소수며, 따라서 참여적인 지역주민과는 거리가 있다.

또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는 주민결의서와 주민동의서 내용은 더욱 심각하다.

주민결의서는 주민이 아니라 대상 마을대표들이 만들어진 서식에 도장을 찍게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지역개발협의회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그 뜻을 받들어 주민을 동원하고 설득하겠다'는, '하향식'의 중간책을 자임하겠다는 결의다.

주민동의서는 노동력의 무상제공과 소유토지의 편입에 적극 협조하며 '주민 전체 결의내용에 승복'하고 마을 발전과 시설물 유지.관리를 위해 몸바치겠으니 사업을 유치시켜 달라는 내용이다. 주민이 서명하는 것이지만 시장.군수에게 제출하는 청원서인 셈이다.

마을일을 위한 노동력과 땅의 제공, 그 협조 정도에 따라 자조.자립.기초마을로 분류해 각각에 상응하는 정부지원 등등…. 완장 찬 공무원이 없을 뿐 예전부터 낯익은 시나리오다.

변화와 개혁은 제도뿐 아니라 인식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주민들의 역량과 책임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방안도 포함시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위한 지원제도를 만들어 놓았으니 주민들이 스스로 의식변화를 감당해 차려준 밥상 챙겨먹으라는 것은 일방적이고 고압적 태도다.

이 사업은 올해가 시행 원년이며, 전체 1000개 권역 중 36개가 선정되었을 뿐이다. 추진 실적에 따라 추후 지원을 재고하겠다는 사업시행 대상에 대한 유연성이 채택된 만큼 추진과정에 대한 현지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사업시행 주체의 유연성도 기대해본다.

김혜순 계명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