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벼랑끝 향해 한 계단씩 핵 재가동 행보 ‘살라미 전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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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연료 재처리시설 재가동 선언으로 북핵 위기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가 연기된 이후 북한은 치밀하면서도 단계적인 방식으로 위기를 고조시켜 왔다. 북한의 고전적 협상 기법인 ‘살라미 전술’을 위기 조성에 적용한 듯한 양상이다.

실제로 북한은 불능화 중단 통보(8월 14일)와 대외 공표(26일)에 이은 원상복구 선언(9월 3일), 원상복구 착수 공표(19일), 재처리시설 봉인 해제 요구(22일 )와 감시카메라 철거 및 재처리시설 가동 선언(24일) 등의 카드를 차례차례 꺼냈다. 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 추방과 봉인·감시장비 철거 및 재처리시설 가동을 거의 시차 없이 강행했던 2003년 1월과는 달라진 양상이다. 이 같은 행보로 인해 “북한이 벼랑 끝을 향해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미국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 때문에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와 검증의정서 문제에 관해 양보하지 않는 한 북한의 행보는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의 다음 수순은 폐연료봉을 재처리시설에 투입하는 것이다. 북한은 일주일 내지 열흘 후 행동에 돌입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현학봉 북한 외무성 부국장은 19일 남북 실무협상에 나와 “북한은 영변 5㎿에 장착해 태운 연료봉 8000개 가운데 4740개를 꺼내 수조에 담아둔 상태”라고 말했다. 연료봉 투입을 전후한 시점에 북한은 영변에 체류 중인 IAEA 감시단과 미국 기술자의 철수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재처리시설 가동 준비를 하는 데는 한두 달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 북한이 5㎿ 핵원자로를 복구해 재가동하려 해도 수개월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남아 있는 폐연료봉 3360개 제거와 불능화 조치로 제거한 부품 재조립은 물론 새 연료봉을 만들어 장전하고 이미 폭파한 냉각탑도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등 관련국들이 북한의 도발 중단을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론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북한 역시 압박 강도를 높이면서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면 시간 간격을 두면서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면 단계적으로 위기를 고조시키는 북한의 압박 전술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예영준 기자

◆살라미 전술=얇게 썰어 먹는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에서 따온 말로 북한이 핵무기 제조 과정을 최대한 세분해서 하나씩 이슈화하고 이를 빌미로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최대로 얻어내는 전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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