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미디어산업 규제완화는 당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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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6개월은 참으로 어지러웠다. 온 사회를 혼란에 몰아놓은 전례없는 이념 대립 및 사회 분열 한가운데 방송이 놓여있었다. ‘PD수첩’ 파문, 정연주씨 해임 사태, YTN 인사 파동 등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의 민주국가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왜 이처럼 방송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는 것일까. 방송을 둘러싼 혼란과 위기의 끝은 어디인가.

최근 우리가 목격하는 이 같은 갈등 양상은 독립적 위상을 견지하지 못한 채 권력 지형의 변동과 괘를 같이해온 질곡의 방송사(史)와 무관하지 않다. 일제 치하, 미 군정, 자유당 정권,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국가 통제와 상업주의는 우리 방송의 고질적 병폐로 자리 잡았다.

방송 통폐합과 땡전뉴스로 대표되는 암울했던 1980년대의 상황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90년대를 거쳐 공공적 공·민영 제도가 제시되었지만 이 시기 방송은 공공성과 상업성 중 어느 목표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선정적 상업주의의 만연, 신규 방송사업의 좌초 같은 문제를 초래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2000년대 들어 지상파방송사의 권력 편향성이 크게 달라졌다고 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번엔 권력 주체가 진보좌파 세력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정연주씨는 이러한 권력-방송 유착관계가 낳은 대표적 코드인사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보수 정치세력과 방송사들은 사사건건 날카롭게 각을 세웠고 그 와중에 KBS 수신료 폐지 움직임 및 국가기간방송법 제안, 탄핵 방송을 둘러싼 갈등 등이 불거져 나왔다. 지난 대선 선거기간 내내 방송의 편향성 시비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명박 정부가 방송과 빚고 있는 갈등은 이처럼 해묵은 숙원과도 같은 것이다.

권력과 방송의 갈등은 무조건 부정적으로 단정할 현상이 아니다. 어느 사회건 권력과 언론의 긴장관계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 내지 잘잘못을 어느 한편으로 돌릴 수 없음도 물론이다. 이전 정권이 임명한 방송 경영진의 교체는 자칫 정권에 의한 부당한 방송통제로 비춰질 수 있지만 코드인사를 청산하고 방송의 당파색을 탈색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기도 하다. 방송에 대한 심의와 규제 역시 방송저널리즘에 대한 간섭일 수 있는 동시에, 방송을 사유화해 오용하는 행태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책임추궁의 의미를 지닌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갈등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양상이 모든 것을 절단낼 듯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권력과 방송의 극한적 갈등은 전 사회를 뒤흔드는 위기로 이어짐을 우리는 지난 몇 개월간 생생히 체험하였다. 이제 국민들은 누구의 잘잘못을 넘어 양측 모두의 과도함을 매우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연주씨를 중립적인 KBS 출신 인사로 교체한 권력적 개입을 수용한 KBS 다수 성원들의 입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강경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국민 앞에 사과한 MBC 경영진의 결정 역시 마찬가지다. 방송을 지키며 동시에 사회 분열을 막기 위한 이들의 고심을 방송이 권력에 굴복했다고 읽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앞선 갈등의 상처들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주 방통위는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대기업 및 신문사의 방송사업 참여 등 미디어산업 규제완화 정책을 제시하였다. 20세기의 낡은 구조 규제틀을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국제 경쟁시대에 부합하는 선진화된 행위 규제로 대체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런 사안들을 정교하게 구체화하는 후속 논의가 과연 가능할지, 이것이 다시금 권력과 방송 간의 극렬한 갈등 양상으로 이어져 그렇지 않아도 힘든 국민들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진 않을지 염려스럽다. 미디어산업 규제 개편 논의를 둘러싼 권력과 방송 양측의 성숙한 자세를 기대해 본다.

윤석민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