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오늘 밤 자살할 거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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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10면

연극 ‘잘 자요 엄마’
11월 2일(일)까지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화 오후 4시·8시, 수~금 오후 8시, 토 오후 3시·7시, 일 오후 3시(월 쉼)
문의 02-766-6007, www.idsartcenter.co.kr

80분이라는 공연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건 무대의 벽시계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 속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똑같이 흘러간다. 비가 내리는 밤 8시에 TV를 보고 있던 엄마에게, 귀가한 딸은 다락방의 권총이 어디 있는지 묻더니 “오늘 밤 자살할 거야”라고 말한다. 농담처럼 시작된 대화는 80분간 현재와 과거, 때론 미래를 헤집는다. 관객은 초조하게 벽시계를 지켜보며 이들의 대화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길 기도하지만, 결말은 느닷없이 덮친다.

‘2008 연극열전 2’의 여덟 번째 작품 ‘잘 자요 엄마’는 ‘2004 연극열전’ 라인업 중 유일한 앙코르 작이다. 4년 만의 되풀이에도 흥행이 실패하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이다. 모녀 관계의 2인극인 이 작품은 실제로 공연 때마다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들의 열연으로 화제가 돼 왔다. 1985년 김용림·윤석화씨 주연으로 국내 초연됐고, 90년 박정자·연운경씨, 98년 손숙·정경순씨가 바통을 이었다. 2004년 연극열전 때는 실제 모녀인 윤소정·오지혜씨가 열연해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간질병을 앓고 있고 남편에게 버림받았으며 외아들이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는 ‘제시’의 고통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엄마 ‘델마’에게 자살을 예고하는 딸 제시의 모습은 뜨악하기까지 하다. 자살 동기만큼이나 의문을 자아내는 자살 예고의 속내를 헤아리며, 관객은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가 동등한 두 인간의 관계로 정립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하는 딸 앞에 “네가 내 것인 줄만 알았어” 하며 절규하는 엄마의 모습은 모녀의 애증을 넘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이번 무대는 관록의 연기파인 손숙씨와 나문희씨가 각기 다른 색깔의 엄마를 보여준다. 각각 연극과 TV를 주무대로 ‘국민 어머니’ 지위에 오른 두 사람은 딸이 셋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번역·각색·연출 등 1인3역을 맡은 문삼화 연출은 “손숙씨가 10년 전 공연에 개의치 않고 새로운 해석에 공감해 줘 연습이 수월했다”고 말했다.

96년 ‘어머니’ 이후 12년 만에 정극 연기를 선보이는 나문희씨는 “오랜만에 관객 앞에서 연기하니 긴장되지만, 몰입하는 시간이 하루하루 행복하다”고 말했다. 딸 제시 역엔 서주희·황정민씨가 캐스팅돼 네 명의 여배우가 크로스로 호흡을 맞춘다.

소극장 연극이 끝나고 20여 분 서성이다 보면 분장을 지우고 나서는 주연 배우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엄마에게 선물하겠노라며 나문희·손숙씨의 사인을 받아가는 이들도 흔하다. 무대나 TV에서 ‘국민 어머니’를 찾을 게 아니라 어머니와 손잡고 공연 나들이하는 것도 올가을 기억에 남을 선택이 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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