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요즘 저자들의 톡톡 튀는 자기소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화가를 꿈꾸다 부모의 반대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지만 ‘선배를 잘못 만나’ 운동권이 되는 바람에 8년 만에 졸업장을 땄다. 동양통신 기자로 일하던 중 광주학살에 대한 언론 검열해 저항해 제작거부운동을 벌이다 유학을 떠났다(이 점에서 학문의 길을 가게 해준 전두환에게 감사하고 있다)….”

지난주 본지 지면에 실은, 손호철 교수(서강대)의 중국 장정 기행기『레드로드』(이매진)의 저자 소개 글입니다. 흔히 책의 겉표지를 넘기면 바로 나오는 뒷면에 글쓴이의 사진도 나오고 소개 글도 나오지요? 요즘 기행문이나 에세이 등 글쓴이의 개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책들의 저자 소개가 이렇게 변했습니다.

과거에 흔히 썼던 방식, 즉 고향, 학력, 근무 경력만 간단히 열거하는 대신 마치 대상의 특징만 잡아 쓱쓱 그리는 캐리커처 같은 문체가 두드러집니다.

다른 책도 한 번 열어볼까요? “대대로 서울 토박이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다니다 군대 갔다오니까 제적당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끝까지 자퇴라고 끝까지 우기고 다녔다. 학교 자퇴 이후 10년 가까이 생활전선에서 자퇴 상태로 지냈다. 오랜 백수생활을 바탕으로 ‘혼자 시간 보내는 법’ ‘아기자기한 백수생활 가이드’ ‘집안에서 어머니 피해다니기’라는 책을 내놓을까 하다 싱거워져 포기, 영화에만 전념하기로 다짐했다….”

2006년에 처음 나왔다가 최근 개정판으로 나온 『김지운의 숏컷』(마음산책)에 나온 저자 소개입니다. 글을 통해 혹은 영화를 통해 무심한 듯한 매너로 싱거운 농담을 건네는 듯한, 김 감독 특유의 유머가 느껴집니다.

“술마시기 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고,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산길과 들길을 하염없이 걷는 것이다….”(장석주의『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뿌리와 이파리)) “검은 ‘맘보 쓰봉’에 ‘나이롱 샤쓰’를 입고 자란 어린 시절은 공선옥은 봄이면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온 봄내 나무을 캐러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공선옥의『행복한 만찬』(달)) “가끔 공책에 야한 그림 그리다가 두들겨 맞는 것을 빼고는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간간이 생기는 일거리로 간신히 먹고 살고 있다…”(『이다 플레이』(랜덤하우스))

물론 이런 소개가 거추장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럴 땐 군더더기 없는 소개 글 자체도 개성의 표현입니다.

저자들의 이런 자기 소개를 유심히 읽다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도 보입니다. 알게 모르게 다들 ‘고달픈’ 시절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명랑만화 분위기인데 잘 들여다보면 나름의 상흔이 보입니다. 이들이 독자들과 한 권의 책으로 만나기까지는 넘어야 할 고비가 다 있었다는 거지요. 유머 감각도 그들이 지닌 열정의 한 자락이 아닐까요.

이은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