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新택리지] 추풍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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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유행가 중에 '추풍령'이란 노래가 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이렇게 시작되는 이 노래는 가수 남상규가 불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추억의 노래다.

이 노랫말 속에 나오는 추풍령은 충북 영동군 황금면 추풍령리에서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충청과 영남을 이어주는 고갯길이었다. 조선시대에 문경새재가 나라 안에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었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고갯길은 추풍령이다. 높이가 200m쯤 되는 이 고개 밑에 조선시대 길손들이 머물던 추풍역이 있었다. 고개를 넘기 전에 지나는 황간은 옛 시절 현이었고 그 황간에는 가학루와 한천 팔경이 있다.

이 고개는 가을철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곳이어서 추풍령(秋楓嶺)이라 하던 것이 단풍 풍(楓)자 대신 바람 풍(風)자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옛날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려면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 조위(曺偉)는 추풍령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므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지다." 이 말은 그 당시 추풍령을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또 '춘풍천리(春風千里)'라는 기행문을 쓴 안재홍은 "조선의 기후가 추풍령을 분계로 삼아 남북이 수이한 바 있거니와 추풍 이북에는 북류수를 보고 추풍 이남은 남류수를 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형상이다"고도 했다.

하지만 통행량이 문경 새재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고개는 죽령과 더불어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선비들이나 영남지방의 관리로 부임하는 사람들이 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죽령은 죽 미끄러지기 때문에 넘지 않았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 그대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聞慶)의 새재 (조령)로 넘어 다녔고 이쪽 지방 사람들은 그 아랫부분에 위치한 괘방령을 넘었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에서 경북 김천시 봉산면으로 넘어가는 괘방령도 이를 넘으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고개로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 그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30분이면 닿는 고속철도까지 나란히 지나간다. 둘러싼 이야기야 어쨌든 추풍령이 역시 교통의 요지임이 오늘에서야 증명된 셈이다.

신정일 문화유산 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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