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은풀렸는데>上.靜寂과 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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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동토(凍土)」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두만강 얼음도 녹았다.그러나 적막하다.어떤 곳은 소름끼칠 정도다.한켠에선 밀수가 춤춘다.그것도 대낮에 말이다.「꾼」들은 설쳐대고 접경의 군(軍)은 눈을 감는다.
지난 16일 오후1시쯤 두만강 너머로 북한 삼장세관이 한눈에들어오는 옌볜 조선족자치주 허룽(和龍)시 충산(崇善)세관 옆.
텃밭에서 쟁기질하는 50대 북한 농부의 발걸음이 총총하다.아낙네가 밭두렁의 잔디를 태운다.텃밭 위쪽 야산을 깎아 일궈놓은다락밭이 눈길을 끈다.평온해 보인다.
『여보시오.』같이 간 중국인 운전사(25)가 소리를 질러도 농부는 묵묵부답이다.자기들끼리도 도통 말이 없다.
30분쯤 뒤 정적이 깨졌다.흰색 도요타 승용차가 인공기가 펄럭이는 삼장세관 옆 도로를 미끄러져 들어왔다.탄 사람은 남자 4명.모두 담배연기를 연신 뿜어댄다.잠시 후 중절모를 쓴 30대 한명이 차에서 내려 강가로 내려온다.미리 약속 한듯 충산쪽20대 조선족 주민 1명이 강가로 다가섰다.강폭은 30여,삼장세관 초소와는 50여.둘은 강가로 바짝 다가앉아 말을 주고받는다. 『어이 술 좀 보내라요.』(북한), 『얼마나 할까요.』(중국) 북한쪽 남자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자 조선족 주민이 고개를 끄덕인다.충산쪽에선 점심을 막 끝낸 주민 네댓이서 강둑에 앉아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소총을 들고 밭둑을 오가던 북한 병사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접선」을 마친 북측 30대가 타자마자 승용차는 백두산쪽 강변 도로를 쏜살같이 달렸다.밀수 약속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충산쪽에서도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조금 전의 20대가술 한 박스를 들고 2명이 탄 오토바이에 오른다.빌린 차로 오토바이 뒤를 따랐다.
1㎞쯤 달리자 강폭 10여의 북한측 강변에서 20대가 술을 건네고 있었다.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자 충산쪽 20대가 부리나케강을 건너온다.그래도 북한 남자는 태연스럽다.
다시 강 길을 내려오자 삼장세관 옆에 세워진 도요타 승용차에서 밀수꾼들이 고개를 내밀어 이쪽을 노려본다.
「꾼」들은 누구일까.
『기름이 모자라 공장도 못돌리는 판에 승용차를 몰 수 있는 신분은 아마 간부들밖에 없을 거요.주민들은 한끼도 못 때워 난리라는데 기껏 한다는게 술 밀수라니….』 조선족 안내원 K(47)씨가 혀를 찬다.
밀수품은 술만이 아니다.옥수수 등 먹을거리와 담배.옷.약품 등이 북쪽으로 들어가고,구리.니켈 등 광물과 약재.명태 등이 옌볜쪽으로 흘러나온다.이것은 그래도 소박한 편이다.
93년 절정에 달했던 북한의 자동차 밀수는 여전하다.접경 텃밭에 양귀비를 심어 아편을 밀수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삼엄한 경비 속의 밀수는 「꾼」과 군의 합작품이다.
무산(茂山)시가 내려다 보이는 허룽시 루궈(蘆果) 야산.
「북한 제1의 철광석 산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야산에 새겨놓은 「속도전」「전격전」과 도로쪽에걸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팻말이 위용을 뽐낸다.
K씨는 『10년전만 해도 무산시의 활기가 중국에서는 부러움의대상이었다』며 금석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광원 숙사 옆 모퉁이에서 30~40명이 물건을 바꾸는 모습이보인다.중국에서 건너간 보따리 장수가 거래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야산을 내려와 루궈쪽 유람구에서 바라본 공장 굴뚝 위론 황사만 부옇게 떠있을뿐 연기가 나지 않는다.인근 광산도시 유선(游仙)도 마찬가지다.석탄을 때는 공장에 연기가 없는 것은 왜일까. 지난달 나진을 다녀온 조선족 張모(41.사업)씨는 『멀쩡한 기차도 서기 일쑤』라며 『한번 서면 기약이 없다』고 했다.고질화된 연료난 탓이다.
91년 중국.러시아가 원유의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공장 가동률은 30~40%대로 곤두박질쳤다고 옌볜대학 金모교수는 말한다.
옌볜=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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