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for Money] 자신의 능력을 오판하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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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외환 위기 직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다른 그룹이 위축되는 가운데서도 대우만은 오히려 세계 경영의 기치를 높이 들던 시점이었다. 당시 심중에 맴돌기만 하던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공격적인 경영 탓에 자금 사정이 어렵지는 않습니까?’ 김 전 회장은 이를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난 언제든 외국 가서, 원하는 만큼 돈을 구해올 수 있는 사람이야.’

적어도 당시로서 그의 자신감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우그룹이 재계 2위까지 올라선 비결은 단 하나였다. 부실기업을 잇따라 인수해 덩치를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수한 기업을 지렛대 삼아 늘 더 큰 자금을 조달해온 것이 그였다. 국내외에서 필요한 자금을 끌어오는 능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언 후 1년도 채 안 돼 대우는 자금난에 허덕이게 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김 전 회장은 지나치게 자신의 성공 방정식을 과신했다. 대한민국의 대외신인도, 나아가서는 대우의 신용이 크게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 정부조차 쉽사리 외부에서 돈을 못 구하는 판에 자신만은 그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치명적 오판이었다. 당시 그가 잘못된 판단을 한 요인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신용경색(credit crunch)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신용경색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신용의 수급이 위축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시중 돈줄을 조인다. 그러나 금리는 낮고 시중 유동성이 풍부한데도 돈줄이 막힐 때가 있다. 금융기관들이 위험 회피 차원에서 신규 대출이나 차환을 줄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가 바로 신용경색이다. 이런 상황은 단순한 시중자금 고갈 현상보다 더 위험하다. 금융시장의 대표 지표라고 할 금리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지표만 믿다가는 착시 현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평상시 건강하던 사람을 예고 없이 쓰러뜨리는 심혈관계 질환에 신용경색을 비유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외환위기 전후나 2000년 대우그룹 부도, 그리고 2004년 신용카드 사태 당시 신용경색을 경험했다.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차입자들은 돈을 빌리기가 힘들었다. 과다한 채무에 시달리는 기업이나 개인은 파산을 면치 못했다. 이는 투자와 소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신용경색은 경제적 고통의 악순환을 유발했다. 신용경색 현상은 거품 붕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미국 내의 신용경색도 닷컴 거품과 부동산 거품 붕괴에서 비롯됐다. 우리의 신용경색 조짐도 마찬가지다. 짧게는 지난 4년여간 주식과 부동산 시장 거품, 길게는 외환위기 이후 지속된 신용과잉(credit expansion)의 부산물이다. 당장 큰 빚을 끌어들여 기업 사냥에 나섰던 한 대기업이 자금난을 해명하느라 바쁘다. 개인 파산과 워크아웃 신청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김우중 전 회장의 마지막 나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금리와 자신의 능력만 믿고 오판하지 말 일이다.

김방희 KBS 1라디오‘시사플러스’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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