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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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자아를 찾기를 원합니까?

이거야 말로 책깨나 읽은 소크라테스 시늉이 아닌가.

- 갈 데가 없어서 왔습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대답을 해놓고 나서 말하는 법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이건 우리 친구들끼리 은연중에 약속한 것처럼 '돌려서 말하기'와는 다른 방법으로 하는 말이다. 단순하게 진실을 표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진실이야말로 복잡하지 않다.

밥상을 물리니 곧 취침 시간이었다. 새벽에 예불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와서 일어나라고 깨울 적에야 못 이기는 체 일어나 세수하고 들여 준 아침 밥상을 끌어다 먹었다. 광덕이 따로 조용한 곳에 있는 동산 스님의 처소로 나를 데려갔다. 그는 밖에 섰고 나에게 발이 처진 마루를 가리키며 들어가 보라고 일렀다. 동승이 나와서 합장하고는 발을 쳐들며 내게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마루 끝에 나아가 앉았고 동승이 미닫이를 열었다. 방 안쪽에 동산 스님이 앉아 있었다. 그가 누군가. 경허 용성 전강처럼 큰스님이다. 나는 행자가 나에게 했던 것을 배워서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서신을 올렸다. 어린아이처럼 곱게 늙은 스님은 슬쩍 보고는 편지를 밀어 놓고 내게 물었다.

- 그래 이 집에 있으면 얼마나 있을라고 그러는고…?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그냥 고개 숙여 묵묵히 앉았을 뿐이었다. 노승도 침묵. 다시 절하고 나오기 전에 한 말씀 올렸다.

- 갈 데가 없으면 쭉 있겠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면접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광덕이 내게 물었다.

- 스님께서 뭐라십디까?

- 이 집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고, 그러시든데요.

광덕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내 대답은 듣지도 않았다. 결국은 있으라는 말이 아니었던가. 나는 다시 객방으로 돌아갔고 하룻밤을 더 묵었다. 아침에 다시 밥 먹고 나서 다른 스님이 찾아오더니 짐 갖고 밖으로 나오란다. 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부지런히 앞장서서 걸어갔고 나도 수걱수걱 가방 들고 따라갔다. 그는 돌계단을 내려가 경내로 들어오는 소나무 우거진 길 위에 세워 놓더니 나에게 일렀다.

- 여기서 기다리면 어떤 스님이 와서 데려갈 거요. 그이를 따라가세요.

나는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돌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새들이 높다란 나무 위에서 이 가지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요란하게 우짖었다. 어디선가 가까운 곳에서 놀러온 듯한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여자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어느 젊은이가 투명한 테너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고녀

범어사 소나무 숲에서 듣던 그 노랫소리는 이후 내가 소설에서 몇 번 묘사를 해보았던 대목이다. 늘 범상하게 들어 넘기던 노랫말이 부처님 법문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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