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2000만원 들인 펀드 보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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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금고를 샀더니 그 안에 금고 값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 있다.’(삼성공조)

‘농업은 죽지 않는다. 천천히 성장할 뿐이다.’(경농)

‘막강한 브랜드에 풍부한 현금과 주식·부동산까지 가진 욕심쟁이.’(롯데제과)

10년차 펀드투자자 한상훈(37)씨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책의 내용이다. 어려운 경제·회계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상장회사를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한 대목이 한씨를 매료시켰다. 그는 “운전하다 길이 막혀 꺼내 읽다가 사고를 낼 뻔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어지간한 투자입문서는 이미 섭렵한 그를 사로잡은 책은 한국밸류자산운용이 최근 투자자에게 보낸 ‘밸류10년펀드’의 연간 운용보고서다.

◇진화하는 운용보고서=자산운용보고서는 펀드가 고객 돈을 어디에 얼마 투자했으며, 그 이유는 뭔지 설명하는 보고서다. 펀드의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 중 하나다. 하지만 그동안 운용보고서는 ‘난수표’에 가까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고, 꼭 알고 싶은 투자 이유나 수익률 근거는 찾기 어려웠다. 펀드 스스로 ‘묻지마’ 펀드 투자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어린이 고객을 겨냥한 어린이 펀드 정도가 운용보고서를 쉽게 만들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장기 투자를 지향하는 펀드가 확산하면서 운용보고서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게 밸류10년펀드 보고서다. 14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하지만 어려운 용어나 난해한 표·그래프는 거의 없다. 대신 투자한 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인상, 영업환경이나 특징을 쉽게 소개했다. 한국밸류운용 이채원 부사장은 “화장실에 두고 읽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보고서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며 “13명의 펀드매니저가 2주일간 꼬박 야근을 한 끝에 완성했다”고 소개했다.

운용사에 맡겨선 만족스러운 보고서가 나오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펀드 판매사가 직접 나서기도 한다. 삼성증권은 판매 중인 펀드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20여 개를 골라 동영상 운용보고서를 만들었다. 펀드매니저를 증권사로 불러 5~7분간 대담을 하며 펀드 운용 내역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삼성증권 마케팅기획팀 장준호 팀장은 “보통 고객들에게 e-메일을 보내면 13% 정도만 열어보는데 동영상 보고서의 개봉률은 30%에 이를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장기 투자 정착에 기여=올 초 수익률 하락으로 펀드 신장세가 주춤해지자 펀드업계도 운용보고서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주가 등락에 따라 펀드 설정액이 들쭉날쭉해선 안정적인 펀드 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밸류운용이 보고서를 만드는 데 과감한 투자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3억2000만원에 달했다. 원칙적으로 운용보고서 비용은 펀드 자금으로 충당하지만 한국밸류운용은 펀드 수익률을 고려해 2억원을 회사가 부담했다. 지난해 28억원의 순익을 낸 회사로선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 회사 이용재 사장은 “투자자가 펀드의 운용 철학과 내역을 마음속으로부터 동의해야 장기 투자를 할 수 있고, 원하는 수익률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자산운용협회 차원에서 보고서 양식을 개선하려는 논의도 시작됐다. 협회 양성욱 부장은 “운용보고서가 지나치게 어렵고 형식적이라는 지적이 많아 투자자에게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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