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 파문 얼어붙은 韓.日관계-진퇴양난 日 총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불 끄려고 뿌린 물이 알고보니 기름이었다.
일본정부가 식민정책을 미화한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총무청장관의 망언파문을 진화하기 위해 소방수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을 11일 한국에 파견하려 했으나 한국정부가 고노의 방한을 거부하는 바람에 꼴이 우습게 됐다.무라야마 도미이 치(村山富市)총리등 연립 3당수가 10일밤 늦게까지 모여 대책을 협의했지만 고노외상의 방한을 중지하기로만 했을 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그저 한국정부의 추후 대응을 지켜보기로만 했다.
일본에서는 이번 사태로 무라야마 연립정권의 서투른 외교술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후지TV의 「간판」앵커인 기무라 다로(木村太郎)는 고노 방한중지 소식이 전해진 10일밤 뉴스에서 『한국정부측과 최소한의 사전 조율도 없이 외상을 파견 키로 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 지적했다.그는 중요한 대한(對韓)외교에 있어 「한국파이프」가 전혀 가동되고 있지 않다는 데 대해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1일자 아사히(朝日)신문은 무라야마총리가 자신의 한일합병 유효발언때문에 한-일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지 불과 한달만에 터진 에토의 망언을 「엠바고」상태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이유로 「엄중주의」 정도에 그친 것은 경솔한 조치였다고 지 적했다.「엠바고」는 어디까지나 일본 국내 정치가와 매스컴의 문제일 뿐이며한국민은 에토같은 역사관을 가진 인물이 각료로 있다는 점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고노외상의 방한 방침이 결정되기 전부터 에토문제를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신호를 일본측에 계속 전달했다.공노명(孔魯明)외무장관이 야마시타 신타로(山下新太郎)주한일본대사를 불러에토망언을 엄중 경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 으며 김태지(金太智)주일대사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전총리.무토 가분(武藤嘉文)전외상.하야시 사다유키(林貞行)외무성 사무차관 등과잇따라 만나 사실상 에토해임을 요구하는 한국정부의 강경의사를 내비쳤다.
궁금한 것은 일 정부가 한국의 강경요구 뒤에 숨은 외교적 「카드」를 몰랐을리 없는데 「엄중주의」로 어물쩍 넘겨버리려한 이유다.일본 언론들은 이에 대해 연립정권의 구조적인 문제를 들고있다.자민당이 에토 해임을 막고 나선 상황에서 사 회당이 섣불리 움직였다간 연정자체가 위기상황에 몰릴 수 있기 때문에 무라야마총리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정부의 강경한 태도 뒤에 숨은 「카드」가 오사카(大阪)아태경제협력체(APEC)때의 한-일정상회담 보이콧이란 사실이 11일 표면화되면서 무라야마정권은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리게 됐다.한국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이자니 자민당의 반발 로 연립구도에 금이 갈게 뻔하며,해임불가 입장을 고수하려니 공들인 잔치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대만이 리덩후이(李登輝)총통 불참을 이유로 APEC를 거부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판에 한-일정상회담마저 깨어진다는 것은 무라야마정권으로선 외교적 치명상이 될 수도 있어 일본정부의 다음 대응책이 주목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