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47.문서에 나타난 韓美관계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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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61년 11월 5.16군사쿠데타에 성공한지 약 6개월만에처음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朴正熙)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당시 케네디 美대통령에게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의사를 먼저 밝힌 것으로드러났다.
또 한국군의 추가파병문제를 놓고 한국정부는 최대한의 경제적.
군사적 실리를 얻으려고 한 반면,미국측은 한국측에 대한 압력의주요카드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다.이같은 사실들은 케네디 및존슨 美대통령 기념도서관 소장문서에서 확인됐다 .
한미 양국의 40대 두 정상인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美대통령이 처음 자리를 같이한 것은 61년 11월14일이었다.朴의장으로서는 전통 우방이자 한국의 각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는 미국에 첫선을 보이는 자리였고,케네디 대통 령으로서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한국의 새 실력자 박정희의 실체를 공식 인정하는 대좌였다.
베트남파병문제는 朴-케네디 1차회담에서 처음 거론됐다.88년8월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회담관련문서에 따르면 케네디 대통령은『베트남의 붕괴를 방지할수 있는 방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있다.그 최후의 단계는 결국 미군병력을 이용 하는 것이 될 것이다.베트남은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문제다.朴의장이 이문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관련문서에는 이 질문에 대한 朴의장의 대답이 약 15행 정도삭제돼 있다.朴의장의 답변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매우 고맙다.미국은 베를린 위기등 부담을 전세계적으로 짊어지고 있다.나는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이 문제를 논의할 테니 朴의장도내일 나와 라이먼 렘니처 합동참모부의장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보다 자세히 토의했으면 좋겠다.필리핀인들과 함께 얘기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서구인들이 할 수 있는 것에는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朴의장이 베트남문제에 대해 무슨 언급을 했길래 케네디 대통령이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맥나마라국방장관과 논의하겠다고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음날 계속해서 열린 朴-케네디 2차회담 관련문서를 계속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 회담에서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당분간 경제적 지원을 비롯해 장비.통신 등 기타 지원활동이 될 것이다 .앞으로 그 이상의 원조를 할 것인지 여부는 베트남국민이 정부를 얼마나 지지하며 자유를 위해 얼마나 기꺼이 싸울 것인가에 달려 있다.만약 베트남국민이 정부를 지지해 자기 역할을 다한다면 朴의장이 언급한 것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이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외무장관을 통해 朴의장과 접촉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이 발언에서 주목할 것은 「朴의장이 언급한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경제적 원조나 軍장비지원 이상의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란 군대파견일 가능성이 가장높다.바로 이것이 1차회담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언급했던 「서구인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 아닐까.
***64년 9월 164명 파병 朴-케네디 1,2차회담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볼 때 朴의장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먼저 밝혔다고 추론할 수 있다.군사정권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재정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朴의장의 고도의 승부수라고 볼 수 있다.김종필(金鍾泌)자민련 총재는 『朴-케네디 회담에서 朴의장이베트남파병의사를 밝힌 것은 확실하다』고 증언했다.
64년 9월22일 10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으로 구성된 제1차 베트남파병단(장교 45명,사병 1백19명)이 부산항을 출발해 베트남으로 향했다.65년 2월14일에는 제2차 베트남파병단인 비둘기부대 선발대 5백83명이,3월10 일엔 본대 1천2백83명이 각각 나뉘어 베트남으로 떠났다.
65년에 접어들어 미국이 월맹에 대해 대대적인 공중폭격을 감행했지만 월맹은 협상테이블로 나오지 않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베트남戰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한국군의 추가파병 요청이 나온 것도 이 무 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美대통령간에 이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65년 5월17일 제1차 정상회담에서였다.89년 8월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회담관련문서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은 朴대통령에게 『베트남에 추가병력을 파견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 다.이에 대해 朴대통령은 『한국정부가 그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한국민들 사이에는 만약 베트남에 너무 많은 병력을 투입해 휴전선이 약화된다면 북한의 과잉행동을 유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고대답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朴대통령에게 『1개 사단을 파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이에 朴대통령은 『한국이 베트남에 더 깊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은 단지 나의 개인적 견해다.한국정부가 이 문제를 다시 연구해야 하고 이 시점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답변했다.
***협상지연으로 실리 朴대통령이 이처럼 확답을 미루자 존슨대통령이 발언을 했다.이 발언중 끝부분 약 3행이 삭제돼 있다.곧이어 朴대통령은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킨다는 신호가 워싱턴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이런 종류의 얘기는 베트남에 대한 협조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존슨 대통령은 『만일한국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사전협의를 하겠다』고 대꾸했다.계속해서 그는 한국군 1개 사단 병력의 추가파병을 요청했고 회담 말미에도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존슨 대통령의 삭제된 발언 내용이다.이 발언 다음의 朴대통령의 답변으로 미루어 보아 존슨 대통령은 한국군의 추가파병약속을 받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거론했음이확실하다.朴대통령으로서도 미국측의 집요한 추가파 병 요구에 즉답하지 않고 지연작전을 씀으로써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얻어내려 했다.실제로 3차 베트남파병에 대한 대가로 한국정부는▲1억5천만달러의 차관▲한국군 유지를 위한 충분한 군사지원▲한국상품의 대미(對美)수출확대 등을 미국측으로부 터 확약받았다.
이후 한국정부는 67년 6월에 있었던 5차파병까지 약 5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전에 투입하면서 파병조건을 둘러싸고 미국정부와숨가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한국의 실리외교가 활발하게 펼쳐진 것이다.

<정창현 기자,이동현 현대사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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