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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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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불안한 세계일수록 메시아가 와서 일거에 모든 불행을 씻어내 줄 것이라는 믿음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이른바 구세주 왕림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를 떠나 이리저리 방황했던 민족인 유대인들이 역경을 만날 때마다 고대했던 존재도 메시아다.

구세주를 고대하는 열망이 극점에 달하면 반드시 메시아가 출현하게 마련이다. 역사를 통틀어 정말 많은 자천 타천 ‘메시아’가 핍박과 환난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예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사람들의 열망 속에서 출현한 메시아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전지전능한 힘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싸늘하게 식는 순간 전까지만이다. 더 큰 구원의 의미를 모른 채 민중은 ‘호산나’의 환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는 고함으로 바꾸고 메시아를 버린다. 이 ‘메시아 필사(必死)의 법칙’은 역사상의 다른 메시아들에게도 적용됨을 볼 수 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공국의 사보나롤라 역시 혼돈의 시기에 출현했던 메시아(?) 중 한 사람이다. 신의 소명을 받았다는 이 신부는 프랑스의 침입으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피렌체 민중의 마음을 신비한 예언과 뜬구름 같은 구원론으로 장악한다. 그의 말이 곧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지만, 종교적 신비주의에 기댄 집단적 최면상태는 그로부터 불과 3년이 못 돼서 깨진다. 사보나롤라는 자신을 구원자로 떠받들던 민중의 손에 의해 화형장의 이슬이 된다.

청조 말 태평천국의 난을 이끌었던 홍수전(洪秀全) 역시 도탄에 빠진 중국을 구원할 메시아로 등장했던 인물이다. 일거에 백성들을 질곡의 삶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예수 동생을 자처한 이 메시아는 짧은 부귀영화를 끝으로 그를 따르던 추종자의 손에 잡혀 죽임을 당한다.

우리나라에 후삼국시대 미륵불의 화신을 자처한 궁예 또한 당시 혼돈의 시대를 말끔하게 정리해줄 구세주로 등장했지만 결말은 보리밭에서 자신을 미륵불로 찬양했던 그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다. 재미있는 것은 메시아 출현이 메시아를 자처하는 자의 자기 환상에서도 기인하지만 늘 시대적 희생 제의(祭儀)에 소요될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현도 사실 ‘경제 메시아 이명박’의 이미지에 힘입은 바 크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크게 실망한 민중이 찾아낸 메시아가 오늘의 이 대통령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선거 당시 내건 ‘연 7% 성장’ ‘4만 달러, 국민성공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일거에 모든 국민을 장밋빛 희망에 들뜨게 했고, 구세주 효과에 의해 경제가 금방 좋아질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정부 출범과 동시에 펼쳐진 고유가와 국제 곡물가격 급등 등 세계 경제 여건의 악화는 메시아 효과라는 심리적 처방 하나만으로 대처해 내기에 역부족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과 관련한 이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선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경제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 물 건너갔기 때문이다. 경제 최우선주의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며 성장이라는 뜬구름의 환상만 잔뜩 높여놓은 이 정권을 향해 돌아온 부메랑인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명박 경제 메시아’에 의존하는 사회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국 조만간 실패를 트집 잡아 자신들이 공모해 만든 ‘메시아’를 희생 제물로 삼으려는 집단 사디즘적 광기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

메시아는 없다. 대통령과 국민이 합리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난국을 헤쳐나갈 뿐이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