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지폐유출과 韓銀독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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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은행강도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영화의 소재로 즐겨 다뤄진다. 그러나 과문(寡聞)한 탓인지 아직까지 중앙은행에서 돈을 훔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이번에 한은(韓銀)에서 발생한 지폐유출사건은 아마도 세계적으로 희귀한 「중앙은행 절도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중앙은행은 은행권,즉 돈을 독점적으로 발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중앙은행의 발권력(發券力)은 일종의 국가주권으로 간주돼 英美계 국가에서는 중앙은행이 면책특권을 갖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재산에 대해선 법원 판결전에는 압류할 수 없게 돼있다.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화폐와 시중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급준비금을 합쳐 본원(本源)통화라고 부른다.
본원통화는 은행을 통해 공급되고 여기에 통화승수(乘數)를 곱하면 총통화가 된다.이것이 바로 시중에 돈이 풀리는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후 교수들은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은행을 통하지 않고도 본원통화가 공급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 탓이다.한은 직원이 직접 돈을 빼내 시중에 공급한 것은 사례로 연구할 가치도 있어 보인다.이 점을 지적해 한은은 앞으로「통화관리」보다「내부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비판도 있다.
이번 사건은 그 성격상 내부직원의 단순한 부정행위로 넘겨버릴수 없는 측면이 많다.최근 빈발하는 사고와 함께 우리 사회의 기강이 총체적으로 해이된 한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범행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적당히 무마하려 했던 상급자의 처리방법도 우리를 분노케 한다.규제완화가 시대적 추세인 지금 규제가 강화돼야 할 부분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중앙은행은「힘있는」기관이다.중앙은행이 정책을 약간만 변경해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정보효과.발표효과등 중앙은행의 정책변경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일도 하나의 학문이 되고 있을 정도다.
미국의 경우 「중앙은행 살피기(Fed Watch)」가 금융기관들의 주요업무중 하나가 되고 있다.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담보로「최후의 대여자」로서의 기능도 한다.금융기관이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가 돈을 대줄수 있겠는가.중앙은행 뿐이다.
금융시스템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뒤에 중앙은행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예금주들도 중앙은행이 해결해주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에 약간 미심쩍은 금융기관에도 돈을 맡기는 것이다. 이와같이 본다면 지폐유출 사고로 중앙은행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점에서 관련 당사자들은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을 파괴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더 심하게 말하자면 국가의 주권을침해한 사건이다.
금융사고가 일반인에게 주는 영향은 한강다리나 백화점등 건축물의 붕괴사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프랑스에서는 1700년대초에 일어났던 은행의 도산 때문에 은행의 신용이 엉망이 돼 2백년이지난 지금도 은행들이「은행」이라는 말을 잘 사용 하지 않고 있을 정도다.
중앙은행이 제기능을 못할 때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고사하고 중앙은행 무용론이 제기될지도 모른다.자칫하면 중앙은행도 민영화하라는 주장이 나올법도 하다.
실제로 민간주주가 참여하는 중앙은행을 가진 나라도 있다.
이번 사고로 얻은 교훈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자면 먼저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는 점이다.
〈포스코 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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