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현미경]“아들 취직 좀…” 손 내미는 유권자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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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06면

일러스트=강일구

지난주 통합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실에 “요즘 선거철이죠”라는 말로 시작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상품을 모 업체에 납품하게 해달라는 청탁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A보좌관은 지역 유권자라는 그 사람의 막무가내식 요구를 회피하느라 진땀을 뺐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표를 무기로 갖가지 무리한 청탁을 하는 유권자들 때문에 총선 출마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손을 벌리는 경우는 줄었지만 요구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워졌다는 것. 시대 상황을 반영한 탓인지 ‘취직 압력’이 특히 빈번하다.

경남지역의 한 초선 의원 캠프는 “집에서 노는 아들의 직장을 구해달라”는 유권자 전화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 10여 분을 응대하던 캠프 관계자는 결국 “여긴 직업소개소가 아니다”라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일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하다 여의치 않으면 “유급 선거운동원으로 뛰게 해달라”는 현실적인 요구로 수정하기도 한다. 총선 기간 중 일당 7만원을 받고 일하는 유급 선거운동원 자리를 탐내는 것. 서울의 한 3선 의원 보좌관은 “법적으로 27명까지 허용되는데 50명 넘게 요청을 해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후보자 괴롭히기’가 서민층 거주지역에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울의 부촌인 이른바 ‘강남 벨트’에 출마하는 한 후보자는 정당 공천이 결정된 다음날부터 캠프에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주상복합단지 주민들이 찾아와 “우리가 몇 가구, 몇 표인지 아시죠”라고 말을 꺼낸 뒤 “우리 단지 인근에 어린이용 시설을 짓겠다고 약속하라”고 압박했다.

한강변 미화사업을 공약으로 내놓은 한 후보는 “우리 아파트 방벽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걸 아느냐, 모르느냐”며 자신의 단지 역시 수혜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강요하는 유권자 전화에 시달렸다. 지하철역 입구를 자기 단지 쪽으로 돌려놓으라는 요구도 곳곳에서 나온다.

심지어 “병원 예약 순서를 앞당겨 놓으라” “세금을 깎아놔라” 등의 억지를 쓰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사례도 있다.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행태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경기지역 한 초선 의원의 보좌관은 “얼마 전엔 모 통신사에서 구한 유권자 300명의 명단을 300만원에 사라는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부산지역의 한 의원 보좌관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후보에게 인사시키고 뒷돈을 챙겼다는 제보가 20건 이상 들어온 상태”라고 말했다.

물론 선관위는 금품 요구 등을 엄단하겠다는 의지다. 17대 총선 땐 200명의 선거운동원을 확보해주겠다며 200만원을 후보로부터 받아낸 40대 남자가 선관위에 적발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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