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북핵 문제와 전략적 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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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측의 최근 행태로 보아 이러한 비관적 시각이 무리는 아닌 것 같다. 12월 초 방북했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미 의회 증언에 따르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친서에서 제기했던 모든 핵 관련 물질, 시설과 계획,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그리고 핵 물질 및 기술의 제3국 이전에 대한 ‘완전하고도 정확한 신고’ 요청을 북측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6자회담의 반전을 위해 고군분투해 온 힐 차관보가 미국 대통령 친서를 지참하고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했는데 김정일 위원장, 아니면 최소한 강석주 부상과의 면담 정도는 마련됐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힐 차관보에 힘이 실릴 것인데, 이런 홀대를 받은 것은 북 최고수뇌부가 비핵화에 대한 전략적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북은 이미 비핵화에 대한 전략적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9·19 공동성명, 2·13 합의, 10·3 합의, 그리고 10·4 남북 정상선언에 동의하는 자승자박의 우를 범하겠는가. 전략적 결단은 내렸지만 그 이행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략적 결단의 이행은 ‘행동 대 행동’이라는 상호주의 원칙에 달려 있다. 이는 “우리도 의무를 다하겠으니 미국도 의무를 다하라”는 부시 대통령 친서에 대한 북측의 구두답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보면 북측의 고민도 읽을 수 있다. 불능화와 신고의 2단계 의무 이행에 병행한 가시적 보상-예를 들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적대국교역법 적용 해제, 그리고 대외 금융 정상화-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측이 전략적 결단을 일방적으로 이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의 친서에서 제안하고 있는 ‘선 핵 폐기, 후 관계정상화’는 동시행동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북이 이를 수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능화와 신고는 폐기로 가는 중간단계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주저앉는다면 6자회담의 미래는 없다. 북한은 불능화와 신고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미국과 여타 6자회담 참가국들은 그에 상응하는 가시적 인센티브를 동시에 제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결단과 그 이행은 북한만의 의무가 아니라 6자회담 참여국 모두의 의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2단계 불능화와 신고가 완료된 시점에서 3단계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북핵 폐기를 위해서는 보다 획기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북한 체제 특성상 전략적 결단의 지속적 이행을 위해서는 협상과정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적인 관여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4개국 평화정상회담 제안을 하나의 ‘정치적 쇼’로 폄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설적 대안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과 미·중 4개국 정상이 회동해 북핵 폐기를 재확인하고 종전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거시적 로드맵 작성에 합의하는 동시에 북·미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상호 적대관계 청산 및 외교 정상화에 대한 선언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이상 바람직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동시행동원칙에 따른 ‘윈-윈’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여기에 차기 정부의 전략적 결단은 필수적이다. 참여정부 제안이라 할지라도 타당성이 인정되면 과감히 계승, 추진해 나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차기 대통령 주도 아래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4개국 정상회담 개최는 한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쾌거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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