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EYE] 외환위기 10년과 ‘워싱턴 컨센서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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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21면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올해로 꼭 10년이다. 1997년 7월 2일 태국에서 촉발된 위기는 10월 인도네시아로 번졌고, 11월 한국을 덮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재정을 긴축하고, 금융규제를 풀고, 무역 및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외국인 직접투자 적극 유치와 공기업 민영화,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 등 ‘IMF 극약처방’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국은 강요된 개혁의 결과로 2001년 8월에 빌린 돈을 앞당겨 갚았고, 지금은 외환보유액 2600억 달러,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주가지수 2000, 수출 3000억 달러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러나 경제의 성장성이 약화되고, 외국자본의 득세 속에 기업의 보수적 경영과 양극화 등 부작용도 함께 불러왔다.

더구나 아시아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쇼크로 10년 만에 또다시 그 깊이를 모를 금융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계은행의 로버트 졸릭 신임 총재는 신용경색에다 고유가, 달러화 급락, 엔-캐리 트레이드, 중국 경제의 과열 등이 겹치면서 아시아의 넘쳐나는 유동성은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협’이라고 공개 경고했다. 글로벌 금융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자던 10년 전 합의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는 말은 1989년 미국 워싱턴의 국제경제연구소(IIE)의 존 윌리엄슨 박사가 처음 만들어냈다. IMF와 세계은행(IBRD), 미국 재무부 등 워싱턴에 본부를 둔 세 기관이 경제위기에 빠진 국가들의 구제책으로 합의한 정책개혁 표준 권고안이다. 80년대 말 중남미 금융위기 때 처음 사용됐지만 이 권고안이 가진 신자유주의적·시장근본주의적 정책성향 때문에 어느새 세계화를 반대하는 국가나 세력들의 타도대상 표적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23개국이 ‘처방’을 받았지만 성공사례는 칠레와 한국 정도다.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컨센서스’를 내걸며 반발했고, 브라질·인도·중국·러시아·이란 등도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우리 방식대로 간다”며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나라별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시장의 조기개방 등 일률적 처방으로 국제 금융자본만 살찌우며 금융시장 불안을 증폭시키고 개별 국가 성장에도 부담을 준다는 반론들이다.

10년 전 동아시아 위기와 최근 미국 서브프라임 쇼크에 대한 처방이 너무 대조적이다. 당시 IMF와 미 재무부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금리인상을 요구, 나라에 따라 금리는 25%, 40%까지 치솟았고 지급불능 사태가 속출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중앙은행은 이번에 금리를 오히려 내렸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투명성과 규제 및 감시 강화를 촉구했지만 이번 사태에서 투명성 강화와 규제도입 요구에는 입을 다문 채 물린 서방은행들을 긴급구제하는 도덕적 해이도 묵인하고 있다.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재직 당시부터 워싱턴 컨센서스를 비판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를 워싱턴의 ‘금융적 위선’으로 매도했다. 지난달 워싱턴의 IMF/IBRD 연차총회에서 제기된 최대 이슈는 ‘세계가 이 두 기구를 더 이상 필요로 하느냐’였다는 익살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나라들은 공통적인 특장들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을 실현하는 방법은 나라마다 같을 수가 없다. 개발경제학의 신세대 기수 대니 로드릭(하버드 케네디행정대학원) 교수의 ‘하나의 경제학, 다양한 조리법’에 따르면 세계 시장과의 통합의 경우 한국은 수출보조금으로, 말레이시아는 수출가공지역으로, 싱가포르는 다국적기업 유인책으로, 중국은 경제특구로, 멕시코는 지역자유무역협정으로, 칠레는 수입자유화로 각기 달성이 가능했다. 그 나라 실정에 맞는 적절한 정책설계가 기존의 이점을 살리고 대내적 제약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달러 제국과 함께 브레튼우즈 체제에도 황혼이 시작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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