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눈치 보느라 … 사업자에 휘둘려서 … 방송위 법도 원칙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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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왜 한국정책방송(KTV) 등 공영 채널만 보도 프로그램 편성이 가능하도록 하나. 이미 뉴스를 하고 있는 기독교방송(CBS).불교방송(BBS).교통방송 등은 어떻게 하나."(A 방송위원)

"CBS 등은 방송사 설립 허가 내용에 보도는 못하는 걸로 돼 있다. 하지만 KTV 같은 공적 채널은 법적으로 뉴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통방송은 한나라당 당적을 가진 오세훈 시장이 대표라 안 된다."(B 위원)

"KTV도 따지고 보면 정부가 주인이고 이는 당적이 있는 것과 같다. CBS나 교통방송은 안 된다면서 KTV만 된다는 건 문제가 있다."(C 위원)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결론을 낼 수 없다. 다른 건 나중에 논의하고 KTV 등 공영 채널의 뉴스 편성권부터 해결해 주자."(B 의원)

지난달 말 방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원들 간에 오간 설전의 한 대목이다. 몇몇 위원이 "방송사의 보도를 법으로 정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다 풀어주자"는 의견을 냈으나 여당 몫으로 추천받은 위원들은 KTV 등 공영 채널만 보도 편성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방송위는 KTV.국회방송.아리랑TV.방송대학TV(OUN)에만 보도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OUN 측이 "우리가 언제 뉴스 하게 해 달라고 그랬나. 왜 KTV에 보도 허가를 내주면서 우리를 들러리로 끼워 넣느냐"고 항의한 것이다. 이 같은 촌극이 벌어진 데 대해 한 방송위원은 "법도 없고 원칙도 없었다. 방송위가 할 일은 안 하고 해선 안 될 일을 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방송위가 정치권과 이해당사자들에게 휘둘려 졸속 결정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방송위의 한 간부는 "정파를 초월해 균형 있게 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며 "방송 정책 최고결정기관으로서의 위상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라는 게 내부 평가"라고 말했다.

방송위의 '무원칙'은 2일 확정된 공익 채널 선정 과정에서도 그대로 재연됐다. 애초 "각 분야에서 한 채널만 선정하되, 필요한 경우 복수 선정을 할 수 있다"고 공지했으나 부문마다 2개 채널씩 뽑는 결과가 나왔다. 한 방송위원은 "어떤 채널은 실력 행사를 해서, 어디는 주도 세력이 여당과 가까워서, 그렇게 자꾸 눈치를 보다 보니 결국 무더기 선정 사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케이블방송 사업자는 각 부문의 공익채널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편성.방영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방송위는 7월 중순 위성 디지털미디어이동방송(DMB) 사업자인 TU미디어가 "MBC와 지상파 프로그램 재전송 계약을 맺었으니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선 4개월째 묵묵부답이다. 심지어 방송위는 90일로 정해진 심의 기한을 연장하기 위해 MBC 측에 "심의를 늦춰 달라는 공문을 보내라"고 요청까지 했다.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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