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배당에서 '장기성장'으로 관심이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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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05면

자본주의가 터를 닦아가던 시절엔 ‘창업자 가문’과 ‘소수의 동업자’가 기업의 주인이었다. 이들 소수 자본가들이 기업의 소유자이자 지배자였다. 예컨대 18세기 말에 설립돼 유럽에서 금융왕국을 일군 영국의 ‘베어링 브러더스’는 독일 출신 베어링 가문의 회사였다. 19세기 중반 정유공장에서 일하다 스탠더드오일을 창업한 미국의 록펠러도 가문을 중심으로 사업을 키워갔다.

보유 주식 너무 많아 팔기 곤란 … 기업경영 간여

그러나 ‘기업 공개’ 시대가 열리면서 지분이 일반 투자자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 시장이 커지고 경쟁이 심해지자 기업들은 대대적인 기업공개와 합병에 뛰어든다. 직접금융을 통한 자금조달을 위해 주식을 증시에 상장하면서 일반 소액주주가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초 상장 주식의 80%가 개인 투자자들 손으로 넘어갔다. 더구나 합병을 거치며 거대해지고 관료화된 기업 조직을 창업자 가문 사람들이 직접 다루기는 벅찼다. 자연스럽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다. 20세기 자본주의에선 제대로 자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따라서 전문 경영자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또 하나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적대적 인수합병(M&A)과 기업매수(Buyout) 열풍이 불면서 경영자가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일이 허다해졌다. 이때부터 펀드들이 시장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세력들은 펀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펀드들은 기업 사냥꾼이나 기존 경영진의 편에 서면서 몸값을 극대화했다. 하지만 M&A 거품은 곧 꺼졌고, 펀드매니저들은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바로 본격적인 ‘경영 참여’였다.

전문가들은 “90년대 초 ‘이사회 쿠데타’를 계기로 펀드자본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건이 IBM에서 터졌다. 93년 4월 1일 판매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에까지 오른 존 애커스가 실적부진 때문에 물러났다. 대신 아주 낯선 금융업계 출신인 루이스 거스트너가 CEO 자리를 차지했다.

그날은 펀드들이 반란을 일으킨 날이었고, 작전명은 ‘코끼리(IBM)를 춤추게 하라!’였다. 미국 교원연금(TIAA-CREF) 등 초대형 연기금 펀드가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등과 연합해 실적부진의 IBM에 징벌을 내린 것이다. 이어 발전설비업체 웨스팅하우스를 비롯해 자동차회사 GM, 소매업체 시어스 등의 경영자들이 펀드 연합군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펀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원래 펀드들은 기업 가치가 떨어지면 경영에 간여하기보다는 주식을 팔고 떠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이를 ‘월스트리트 룰’이라 부른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주식을 마음대로 팔기 힘들어졌다. 펀드로 돈이 몰리면서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다 보니, 주식을 시장에 내놓아봤자 제대로 팔지도 못하면서 가격만 떨어뜨리는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펀드에 편입된 주식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의결권 행사 등으로 경영에 적극 개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펀드는 기업들이 영속하면서 수익을 늘려나갈 수 있도록 경영을 감시하고 또 지원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게 됐다.

최근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국내 기업들에 대해 “단기 배당에 연연하지 않을 테니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투자에 적극 나서달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엔 ‘유니버설 오너십’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다. 펀드들이 한 나라의 모든 산업으로 분산된 거대 주식 포트폴리오를 갖게 됨으로써 국민경제 전반의 안정적 성장에 관심과 책임감을 갖기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펀드에 편입되는 기업이 워낙 많아지다 보니 경제 전체가 잘 굴러가도록 하는 게 펀드의 장기 수익을 높이는 지름길이 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존경받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에 따라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을 지원하는 사례가 늘고, 아예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사회책임투자(SRI) 펀드’까지 생겨났다. 펀드에 돈을 넣은 투자자들도 펀드의 이런 움직임에 동조하는 추세다. 어차피 노후생활 등에 대비해 길게 보고 돈을 넣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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