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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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실종 ○26 죽는 날까지 의리를 변치말고 살기로 한 우리악동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에도 매사에 의견이 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신촌 버스정류장에서 점보는 할아버지 말로는 사람이라는 게다 사주가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에 각자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한일이라고 했다.
한번은 악동들끼리 핸드플레이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저 다 생각들이 달라서 놀라고만 적이 있었다.대개 우리가 그런 생물학적인 걸 말할 때에는 각자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서 결국은 서로가 얼마나 닮았느냐를 확인하는 기회 였던 거였다. 그건 다리를 떠는 버릇같은 것이며 안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니까 딱 끊을 수 있더라고 영석이가 그러니까,그건 한번 알면 끊기가 아주 어렵고 끊어야 할 이유도 없는데 계집애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구 승규가 자신있게 반박했다.나는 책에서 읽 은 것과 경험을 토대로,그걸 알맞게 하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좋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거야 각자가 꼴리는대로 사는 거지 뭐.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사주가 다 다른데 말이야.
그런데 가끔은 완전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가령,우리에겐 학교라는 게 필요 없다…라고 한다면 이거야말로 모든 학생들이 한마음으로 갈구하는 간절한 바람일 거였다.그래도 학교는 없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선생님들에게는 학 교라는 게 꼭 필요하니까.
학생과 선생이 다같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방학 말이다,방학….
아,성적표를 나눠주지 않는 방학이라는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적표를 받아들 때마다 나는 우리 학년 애들이 저마다 다른 사주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랐다.그렇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성적표로부터 시험으로부터 공부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말이다.
성적표 때문에 많이 망설이다가 나는 정직한 워싱턴 쪽을 택했다.재국이라고 자기집에 퍼스널컴퓨터와 레이저프린터를 가지고 있는 놈이 있는데,그놈에게 만원만 내면 내가 원하는대로 성적표를만들어주는 거였다.단돈 만원에,나는 내가 일등을 한 성적표를 어머니에게 갖다 바치는 효자 노릇을 할 수도 있었지만,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어머니의 기대가 너무 부풀어서 장기적으로는 내 입장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이다.하여간 기말고사 때왕박이 적당히 도와주었다고는 하지만,어머니가 내게 바라는 등수에 비한다면 말도 안되는 결과에 지나지 않았던 거였다.
어머니는 내 성적표를 내려다보시면서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었다.나는 어머니 앞에 선 채 뒷머리만 긁적이고 서 있었다.
『앉아.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 나는 어머니에게 내 실상을 알게 하면서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어차피 아셔야 할 진실인 것을.
『너 요즘 이상해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셨다.
아 이런 때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자살하고 싶은 순간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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