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67.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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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실종 ○22 하여간 왕박사로 말하자면(실제로는 「왕박」으로 줄여서 부른다)참으로 독특한 녀석이었다.1학년1학기 때 별명은 가분수였는데(실제로 머리통이 남달리 크고 길었다)지내면서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었기 때문에 별명이 왕박사로 바뀐 거였다. 용모상 특징으로 부르는 건 어쩐지 녀석에 대한 실례라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된 결과였다.왕박사라는 별명에는 사실 아이들의 녀석에 대한 호감과 존중의 의미가 다분히 포함돼 있는 거였다. 우선 우리들 악동들만 해도 은근히 왕박을 좋아했다.우리는 대개 범생과(공부 잘하고 선생이나 어른들 말이라면 깜박 죽는 모범생)아이들을 무조건 비웃거나 쪼다로 여기거나 했는데 왕박만은 예외였다.왕박은 잘난 척하지 않았고,자기와 다른 식으로 사는 아이들을 함부로 업수이 여기지 않았다.왕박은 특별히 같이 몰려다니는 아이들도 없었지만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그런 녀석이었다.
한번은 우리 악동들이 학교 목공소 뒤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왕박이 목공소에 왔다가 우리를 보았다.다른 범생들 같으면우리를 못본 척하거나 우리가 자기를 부를까봐 애매한 표정을 짓거나 할 그런 장면이었다.
『너희들 담배가 머리 나쁘게 한다는 거 알지? 그러지 않아도나쁜 머리 가지구 어쩔라구 그래?』 왕박이 그렇게 말할 때의 얼굴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녀석을 좋아하지 않고는 못배길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왕박 덕분에 기말고사라는 난국을 그런대로 넘겼다.왕박은 답을 다 보여준 건 아니지만 적당히 체면을 유지할 만큼은 협조해 준 거였다.
우리 학년에서 왕박과 정반대 입장에 우뚝 서있는 녀석이 건영이었다.녀석은 별명도 없었다.가령 건영의 머리통이 아무리 크고길다고 했어도 아이들은 아무도 가분수라고 부르지 못했을 거였다.그만큼 건영은 아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키도 백팔십 가까이되는 데다가 인상도 곱지 않았다.건영이 1학년 2학기 들어 우리 학교에 전학왔을 때 소년원에서 풀려난지 얼마 안됐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건영은 늘 교실 맨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서 교실 안의 아이들이 노는 꼴을 가소롭다는 듯이 관망하는 자세였다.늘 혼자였는데,간혹 양팔을 벌려 기지개를 켜면서 따분해하기는 했지만 외로워하는 기색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건영은 종종 며칠씩 결석을하기도 했는데,선생들 하고는 어떻게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너하고 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며칠 뒤였다.마지막 수업이 끝났을 때 내가 맨 뒷자리의 건영에게 가서 속삭이자 녀석은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대꾸했다.
『그래에?』녀석이 혼자 낄낄 웃었다.
『계집애들 하고 여관방에서 놀다가 잡혀왔다더니 애라도 떼어내야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야.
』 나는 건영의 하숙방에 따라가서 써니에 대해서 다 말했다.나는 써니가 깡패 같은 놈들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제일 많다고 말하고(써니가 얼마나 매혹적인 애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너라면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건영은 하숙 방 이부자리에 삐딱하게 반쯤 누워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정말… 좋아하나보지.건영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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