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회장 시절의 김우중씨.
1970년대 중반 UCLA에서 나와 휴스 교수가 CT를 개발했다. 내가 푼 CT의 수학적 해법도 거기에 들어가 있었다. CT가 한창 뜨니까 일본 산업계에서 30명 정도가 UCLA로 단체 견학을 온 적이 있다. 그들은 CT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고, 사진도 찍어 갔다. 그러더니 다음해 일본에서 CT 상품이 개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에 나는 “한국에서 CT를 만들 수 있었으면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을 텐데” 라며 아쉬워했다. 외국에 나가 있으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은가. 비록 나는 애국자는 아니지만 어떤 일이든 한국과 결부시키곤 했다. 마침 KAIST로 온 나는 CT 국산화를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KAIST 대학원에서 CT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연구비 확보가 급선무였다.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처음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이용태 박사를 만나고, 과기처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찾아갔다. 김 회장과는 약 4시간 동안 얘기했다. CT를 국산화하면 수출 전망이 밝다며 설득했다. 김 회장은 연구비 5억원을 내놓겠다고 약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 같았다. 온갖 곳을 다 가도 헛고생만 했는데 드디어 구세주를 만났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한 순간이었다.
김 회장과의 미팅이 끝난 뒤 동석했던 이경훈 대우 상무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서울대 공대 1년 선배였다.
“조 교수,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지금 CT 개발에 넣을 5억원이 어디 있어요. 1억원도 없어요.” 내가 하도 강하게 얘기하니까 김 회장은 마지못해 빈말로 약속을 해놓고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맥이 확 빠졌다. 서울 홍릉 KAIST 연구실로 들어와 곰곰이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는 CT의 부품 생산과 제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 오히려 잘 된 것 같았다. 각종 정밀기계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CT 개발에 나섰다고 해도 실패의 연속이었을지 모른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내가 그때 CT를 시작했다면 MRI는 어쩌면 손도 못 댔을지 모른다. 한국 실정에서 연구비로 보나 주변 기술로 보나 CT와 MRI를 병행하기는 어려웠다. 위기를 기회로, 어떤 사건이 닥쳐도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내 성격이 그때도 그대로 나왔다.
“그래, 이왕에 될 것 같지 않으니 다른 연구 테마를 찾아 보자.“
결국 내 손에 잡힌 게 MRI였고, 그 연구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또 한번 경쟁하는 계기가 됐다.
요즘 신문을 통해 김우중 회장의 근황을 접하면서 나는 그때의 김 회장을 떠올린다. 당시 김 회장이 지원하지 않았던 것이 내겐 오히려 약이 됐다고 생각한다. 세상사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한 경험이었다.
조장희 <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가천의과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