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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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 토요일은 어쩐지 우울한 토요일이었다.
승규가 먼저 버스를 타고 가버렸고 그러자 다른 악동들도 맥이빠진 표정으로 하나하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흩어졌다.혼자가 됐는데 특별히 가야할 곳도 없을 때 그리고 해야 할 일도 없을때 왈칵 허전해지는 거였다.게다가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짓도 없다는 건 지독했다.
나는 일단 서교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집어탔다.써니도 오늘로 근신이 끝났을 거였다.
거리에 서서 버스를 기다릴 때에는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의 표정이 생소해 보이는데,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거리의 사람들 표정이 또 낯설어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다.나는 누군가가 내 표정을 보고 어쩔줄 모르고 있는 내 심사를 알아차릴 까봐 일부러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내가 서있던 근처에 앉았던사람 하나가 신촌시장 정거장에서 내리자 아주머니 하나가 결사적으로 사람들을 밀쳐내고 나타나 빈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 아주머니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 니까 나는 왠지 더 울적해지고 말았다.
홍대 입구에서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거기서 언덕길을 한 10분쯤 가니까 써니네 집이 보였다.엄마하고 단둘이서 살기에는 너무 큰 이층집이었다.써니네 집 대문옆으로 난 막다른 골목에서는 써니 방의 창문이 보였다.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나는 골목길의 가로등에 기대고 서 있다가 다리가 아프면 남의 집 대문 난간에 책가방을 깔고 앉아 있기도 하다가 그러면서 우두커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88을 반갑은 피워댔을 거였다.막다른 골목이라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큰길로 가서 전화를 걸어볼까 몇번이나 망설였지만 써니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할 말이 없었다.하여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탁 끊어버리는 건 아주 질색이었다.나도 팔말처럼 한번 그래볼까.담배 한대 피울 동안만 마지막으로 써니를 만 나게 해달라고. 미국에 팔말이라는 가난한 청년이 있었는데 여자의 엄마가 결혼을 반대해서 결국 여자와 헤어져야 할 상황이었다.팔말이 여자의 엄마에게 말했다.마지막으로 담배 한대를 피우는 동안만 만나게 해달라고.그래서 여자를 만났는데,팔말은 담배에 불을 붙여서 테이블 위에 세워뒀다.그래야 가장 천천히 타들어가니까.그런데도 담배 한대는 너무나 빨리 타버렸고 그걸로 여자와의 마지막시간도 끝이었다.
팔말은 나중에 담배 공장을 차렸는데,다른 담배 보다 조금 더긴 「팔말」이라는 담배를 만들어냈다.나같은 경우를 당하는 청년이 있다면 단 일초라도 더 이별의 시간을 주고 싶다면서.그게 롱사이즈라는 거였다.팔말 담배는 단번에 유명해져 서 팔말은 갑부가 되었다나.
가로등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어두워진 거였다.배가 고팠지만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써니의 방에도 반짝 불이 켜졌고커튼이 열렸다.그리고 창가에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달수야… 멍달수….』 창문이 한번 열렸다가 닫혔고,5분쯤 뒤에,가방을 깔고 앉은 내 앞에 써니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어…? 밥은…?』 써니가 속삭이는데 어인 일인지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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