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할아버지와 금반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9면

지난 겨울, 간호과 1학년이었던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임상실습을 나갔다. 종합병원에서 가장 바쁜 내과병동이었다. 긴장되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806호 할아버지 때문에 특히 더 그랬다. 몇 년째 의식이 없는 할머니를 돌보는 할아버지는 까탈스럽고 유난스럽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시트 좀 빨리 갈아 주그라” “환자복 좀 갖고 온나”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 내게 잔소리도, 요구사항도 너무나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생, 일로 와서 내 좀 도와주그라” 또 뭐지? 하는 심정의 내게 할아버지는 둥글게 매듭진 실 한 올을 내밀었다. “그거 묶은 거 풀러가 길이 좀 재 보그라 내가 눈이 어두워가 도통 보여야 말이제” 나는 별걸 다 시킨다고 생각하며 길이를 알려줬다.

 실습 마지막 날, 병실을 하나하나 들러 그새 정든 환자들과 인사를 하며 806호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저 오늘 마지막이에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그러자 그 까칠하던 할아버지가 내게 음료수를 하나 건네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내 덕분에 할머니의 소원 하나를 들어줬다면서 고맙다고 했다. 어리둥절한 내 눈에 할머니 손가락의 가느다란 금반지가 들어왔다. 젊은 날 무심하기만 했던 나를 보며 살아온 할멈이야, 가난 때문에 반지 하나 껴보지 못했어, 시집와서는 늘 고생만 했지, 이제야 좀 나아진 형편에 숨 돌리나 싶었는데 이렇게 정신을 놓아버린 거야, 이야기 하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살아서 꼭 내손으로 반지 하나는 해주고 가야지 싶었는데, 무턱대고 사러가니 반지 호수를 알아오라 안카나. 그래가 우예 손가락 둘레 잽니꺼 물었디만, 실로 하면 된다카드라.”

 할아버지는 어두운 눈으로, 투박한 손으로 할머니의 손가락을 실로 몇 번이나 감았을 것이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랜 간병에 지쳐 성질만 부리는 할아버지라 여겼던 내가 부끄러웠다.
 다이아몬드도 진주도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빛나던 금반지. 할아버지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 프러포즈였을 그 실반지가 생각난다.  

손예슬(21·대학생·대구시 서구 비산동)

10월 12일자 주제는 술버릇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주소·전화번호·직업·나이를 적어 10월 8일까지로 보내 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원고료를 드리며, 두 달마다 장원작 한 편을 뽑아 현대카드 프리비아에서 제공하는 상하이 왕복 항공권 및 호텔 2박 숙박권을 제공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