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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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동우가 한손을 뻗어 내 머리를 아무렇게나 갈퀴질해서 흐트러뜨리면서 빙그레 웃었다.써니하고 처음으로 하고 싶다는 내 말에 대한 반응이었다.나는 동우가 나를 어린애 취급하듯이 구는 걸 내버려두었다.호적상의 나이가 아니더라도 동우는 나 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어른이었다.싸움도 나보다 더 잘했고,자동차를 운전할줄도 알았고,아마 계집애에 관해서도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거였다.
『그럼 넌 써니가 대학에 못가면 신부님이라도 돼야겠네.』 무엇보다도 나는 동우에게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어쨌든 동우는「다 울지도 못한」녀석이 아닌가.
『넌 모르겠니.가령 부모를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과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거하구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일이겠느냐구.둘 다좋은 일이지만 거기에도 우선 순위라는게 있잖아.』 『써니가 자기엄마에게 말한 건 효도를 위한 거짓말이다 이거지?…꿈보다 해몽이 좋군.』 『하여간 내 말은… 써니하고 하고 싶다 이거야.
처음엔….』 『알았어.알았으니까 잘 해보라구.』 동우가 낄낄거렸다.차가 스포츠센터근처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동우에게 큰길에서 내려달라고 하였다.어쩐지 텅 빈 밤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스포츠센터 앞에 내려주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조금뒤에 클랙슨 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았더니 후진으로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동우가 아까 카페골목에서 계집애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차창을 내리고 내게 소리쳤다.
『오늘 고마웠어.…잘 자라구.』 동우는 그러고는 재빨리 가버렸다.말해놓고 나서 쑥스러운가 보았다.나는 동우의 친구가 돼줄수 있었던 것이 좋았고,써니에 대한 내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스스로 대견해서 기분 좋았다.새벽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나는 그즈음의 내가 좋 아하던 어떤 시구를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 새벽 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구름 몇장, 왜 어떤 여자는 웃고 어떤 여자는 울고 있는가.
왜 햇빛은 그렇게도 쏟아져내리고 흰 길 위에 검은개는 어슬렁거리고 있는가.
다행히 식구들은 아무도 내가 빠져나간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어둠에 눈이 익어 천장의 무늬들이 눈에 들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자꾸만 계집애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써니와… 하영이와… 카페골목에서 허리를 굽혀 차 안을 들여다보던 애들과… 변소의 구멍으로 엿본 2반 계집애의 얼굴과….
써니 엄마 말대로,좋은 대학에만 가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다 주어진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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