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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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금은 우리 아버지가 아주 높은 사람이 돼 있지만 말이야.
』 동우가 캔맥주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말을 이었다.새벽의 달빛이 강물의 흔들림에 따라 출렁거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진 사실 작년에 내가 미국에서 오기 전까지만 해도돈많은 장사꾼에 지나지 않았거든.내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게 세상에 알려지면,우리 아버진 자기가 출세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생각한 거야.그래서 날 급히 서울로 불러들인 거야.』 『너희 아버지 생각이 들어맞았네.그래서 높은 분이 되셨다니까.』 나는 입안에 품었던 담배연기를 까만 하늘로 후우 내뿜으면서 장난스럽게 그랬다.누군가 아주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사람의 옆에 있을 때에는 한쪽이나마 분위기에 휩싸여서는 안되는법이었다.
『말도 안돼.아버진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내가아프리카에 가 있거나 서울에 있거나를 결정짓는 건 어느쪽이 아버지에게 유리하냐에 따라 결판나는 거야.어느쪽이 아버지의 체면과 출세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한 거 지.너 내 말아직도 모르겠니.』 『그래,대강은 알겠어.그렇지만 니네 아버지가 널 중학교부터 미국에서 다니게 한 거는 어쨌든 널 위해서였을 게 아니냐 이거지.』 나는 말하고 나서,피우던 담배꽁초를 휘익 강물을 향해서 던져버리고 옆에 세워두었던 캔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그러면서 동우의 눈치를 살폈다.동우는 캔맥주를 다 마셨는지 알루미늄 깡통 가운데쯤을 찌그러뜨리고 또 반으로 접어서 휘익 강 물에 던져버렸다.담배꽁초나 빈 깡통 따위를 강물에휘익 던지는 건 아주 나쁜 짓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환경문제까지 고려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우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길바닥에 무어라고 무어라고 긁적이고 있었다.그러다가 문득 고개를쳐들고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난 중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쫓겨났어.아버진 그런 아들이 챙피해서 미국으로 내몰았던 거야.…그래,그게 전부야.』 동우가다시 고개를 꺾고 어깨를 들먹였다.
나는 동우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그래,오늘밤에 같이 나오기를 잘 했다고 나는 생각했다.동우에게는 내가 필요했던 거였다.
2학년으로 들어서서,한번은 상원이가 건방진 동우새끼를 한번 손봐야 한다고 그랬지만,나는 학교 안에서는 아이들과 한번도 싸우지 않은 우리의 전통을 깰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반박해서동우를 지켜주었다.그때 나는 이미 한번 동우와 새벽 드라이브를한 적이 있었고,어쩌다보니 그게 동우와 나만의 비밀처럼 돼 있었다.우리는 이미 친구였던 거였다.
『아가들이 밤늦게 여기서 뭐헌다냐.』 뒤돌아보니,동우와 내 뒤편으로 세 놈이 서 있었다.키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어깨는 우리보다 훨씬 넓은 놈들이었다.세 놈 다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일어나 이 녀석들아.어… 이 녀석은 울고 있었나봐.』 모자중의 하나가 발로 동우의 궁뎅이를 툭툭 찼다.동우가 천천히 일어나는가 싶더니 모자 중의 하나가 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거의 동시에 다른 모자가 동우에게 달려들었고,나도 재빨리 일어나서 남은 한 녀석과 마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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