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77.황태자 박철언(1)-6共의 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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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우리 현실에서 대통령이 황제에 비유되듯이 제2의 실력자는 흔히 황태자로 불려왔다.
3공화국 초반에 朴正熙대통령의 조카사위였던 金鍾泌민자당대표가황태자로 인구에 회자되었고,5공화국에서는 全斗煥대통령의 친동생全敬煥씨가 그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면 6共에서 황태자는 단연 朴哲彦의원이었다.그는 盧泰愚대통령의 처고종사촌 동생,다시말해 영부인 金玉淑여사 고모의 아들이다.
朴의원은 지금 영어의 몸으로 의원직 박탈의 위기 속에서 대법원의 최종 판결만 기다리고 있다.마치 金鍾泌대표가 5共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규제받고,全敬煥씨가 5共비리의 대표격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야했던 것처럼.
법정에서 다룰 죄의 유무나 경중은 차치하고,일부에서는「朴의원이 누렸던 황태자의 권력이 앞의 두사람보다 훨씬 컸었다는 증거」라는 극히 정치적인 해석을 하기도 한다.황태자들이 누린 권력의 크기를 구체적 수치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 도 朴正熙.
全斗煥대통령에 비해 盧泰愚대통령이 남의 얘기를 더 귀담아들었던성격임은 분명하다.그는「황태자」외에도 별명이 많다.
그가 청와대비서관과 안기부특보로 근무할 당시,다시 말해 盧泰愚대통령 탄생이전 그의 별명은「PC(Personal Computer)」였다.컴퓨터처럼 정확하게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 붙은 별명이다.그만큼 유능했다.
盧泰愚대통령이 탄생한 이후朴의원의 별명은「SP(Super Park)」이었다.슈퍼맨처럼 못하는 일이 없는 無所不爲의 권력자란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황태자」란 별명이 가장 어울리던시절이었다.
朴의원이 황태자로 불리는 것이 어울렸던 원초적 이유는 그가 盧대통령과 친인척관계이기 때문이다.「처고종사촌」이란 처가의 고종사촌으로 사실 몇다리 건넌 혈연관계다.하지만 盧대통령과 朴의원간의 관계는 단순한 혈연적 거리감을 뛰어넘어 각 별하다.이는가족사적 배경을 통해 이해할수 있다.
먼저 盧대통령에게 있어 妻家는 남다르게 존중됐다.
盧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잘 아는 Q씨는『일부러 처가쪽을 가벼이 봤던 당대의 보통사람들과 달리 盧대통령은 처가쪽을 매우 존중했다.이는 盧대통령이 결혼당시부터 상대적으로 처가에 대해 많이 느꼈던 부담감,일종의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설 명했다.
Q씨의 이어지는 증언.『盧대통령은 사실 결혼당시 집안사정으로볼 때 세속적인 의미에서「과분한 아내를 얻은 셈」이죠.盧대통령이야 대구 변두리의 이름없는 집안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지만 金玉淑여사의 집안,다시 말해 金復東의원의 집 안은 대구에서도 꽤 잘 사는 집안이었어요.盧대통령의 친구였던 金의원이 여동생인 金여사를 소개했지만 사실 金여사는 盧대통령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았죠.金여사야 경북여고를 나온 재원에 미모까지 갖췄고,집안도 번듯했으니 뭐하나 빠지는게 없잖아요.오빠인 金의원이적극 권해 결혼은 성사될수 있었어요.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예요.盧대통령은 동서인 琴震鎬의원에 비해 처가쪽에서 대우를 덜 받았습니다.이런 사정은 盧대통령에게 보이지않는 심리적 부담으로작용했고,이는 거꾸로 처가쪽에 대한 각별한 배려로 나타났지요.
』 그럼 당시 盧대통령 처가에서 朴哲彦의원의 존재는 어떠했는가. 朴의원은 한마디로 처가쪽의 보배였다.일찍이 영민했던 朴의원은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경북고를 거쳐 서울大법대에 합격하고 당당히 수석졸업까지 하자 그에 대한 주위의 기대는 대단하지않을수 없었다.그중에서도 金여사가 사촌동생인 그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고 한다.그래서 金여사는 盧대통령의 영관장교시절 넉넉지못한 살림에도 대학생인 朴의원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비록 몇다리 건넌 처고종사촌동생이지만 朴의원은 친동생이상으로 盧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을수 있었 던 특수관계중의 특수관계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全斗煥대령을 포함한 盧대통령의 친구들도 朴의원을알게 되면서「똑똑한 젊은이」로 머리속에 새겨두게 된다.朴의원이일찍이 법조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朴의원은 사법고시에 합격하면서 법무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됐다.당시 법무관이 서울지역에 배치받는 것은 대단한 배경이 있어야만 가능한 행운이었다.
그런데 무명의 朴의원이 당당히 서울 한가운데인 영등포 6관구에 배치받은 것이다.법조계에서는『뭔가 대단한「빽(배경)」을 가지고 있는 친구』로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6관구에 배치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물론 盧대통령과 그 친구들의 힘이었다.당시 육군의 인사를 담당했던 육본 인사운영감실에는盧泰愚대령의 친구 權翊鉉대령(현 民自黨의원)이「대령과장」이란 보직을 차지하고 있었다.「대령과장」이란 보직은 대령급들의 인사를 좌우하는 막강한 자리였다.朴법무관을 포함한 신임법무관들의 근무지 배치를 결정하는 특수병과과장 역시 權대령의 관할(?)대상인 대령이었다.權의원은 이에대해『그때 盧대통령이 朴법무관의 보직과 관련해 부탁을 해 담당과장에 게 한마디 해주었던 것으로기억됩니다』고 확인해주었다.
물론 朴의원이 혈연이라는 특수관계와 일찍부터 꿈꿔온 야심만으로 황태자가 된 것은 아니다.그는 분명히 盧泰愚대통령 만들기에남다른 공을 세웠기에 황태자가 될수 있었다.
당시 신군부의 한 핵심 H씨는『10.26직후 합수부를 만들때당시 盧泰愚장군이「쓸만한 사람」으로 추천한게 朴검사였죠.盧장군이 추천한 사람은 딱 두명입니다.나머지 한 사람은 李源祚씨죠.
朴검사는 합수부시절부터 참여했고 李씨는 나중에 국보위를 만들때참여했죠』라고 기억했다.
朴의원은 국보위에 참여하면서 5共 헌법을 기초하는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리고 5共 초반부는 청와대 비서관으로,후반부는 안기부장특보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해갔다.
朴의원은 구속되기전『나는 국보위에 참여하면서부터 盧泰愚 대통령만들기를 결심했으며 이를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곤 했다.정말당시부터 盧泰愚 대통령만들기란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했는지는 알수 없다.하지만 적어도 朴의원이 일찍부터 盧泰愚 씨에게 권력주변의 고급정보를 은밀히 제공함으로써 권력핵심을 향한 盧씨의 귀와 눈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盧씨는 5共 초반부터 가장 가능성 높은 2인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외곽만 맴돌았을뿐 핵심적인 정보와 의사결정과정에서 상당히 소 외돼 있었다.
朴의원을 잘 아는 X씨는『朴의원은 청와대비서관으로 근무할 때부터 수시로 盧씨를 만나 청와대 돌아가는 얘기를 해주었지요.특히 당시에는 盧씨에 대한 각종 견제성 정보등이 청와대에 많이 접수되었는데,「盧泰愚후계가능성」을 미리 감지한 일 부 청와대참모들은 일부러 이런 정보를 朴의원에게 귀띔해주기도 했어요.盧씨에게 있어서 이런 정보는 매우 소중했을 겁니다.2인자로서 언제뭐가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는 사람에게 미리미리 지뢰의 위치를 알려주고 피해갈수 있게 해주는 것이나 같았으니까요.그러니盧씨 입장에서 朴의원을 애지중지 하지 않을수 없죠』라며 권력핵심세계에서 정보제공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月桂樹會 만들어 朴의원이 본격적으로 盧泰愚 대통령만들기에 나선 것은 85년 안기부장특보로 옮겨가면서부터였다.85년은盧泰愚올림픽조직위원장이 전국구의원이 되면서 민정당대표로 정계에본격 진출한 때이기도 하다.청와대에 있을때부터 朴의원은 각부처의 엘 리트로 구성된 별도의 팀을 만들어 운영했는데,안기부로 옮기면서 이를 확대해 사실상 안기부내의 盧泰愚비밀조직으로 활용했다.X씨는『朴의원은 당시 張世東경호실장이 안기부장으로 옮겨가자 스스로 안기부근무를 자청했죠.능력있는 朴비서관이「張부 장을돕고싶다」고 하니 張씨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죠.하지만 朴의원의 내심은 盧泰愚대통령만들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보자는 것이었죠.朴의원은 안기부의 각종 고급정보를 盧대표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했습니다.』 X씨의 계속되는 증언.『朴의원은 매일 안기부장에게 보고하는 보고서를 별도로 한부 더 만들어 연희동 盧대표 집으로 보냈습니다.물론 대부분은 안기부장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될내용이었죠.全대통령이 보고받을 내용을 盧대표가 먼저 보는 셈 이죠.필요한 경우에는 朴의원 자신이 직접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盧대표집으로 찾아와 보고서를 전달하고 배경을 설명해주는등밀담을 나누곤 했지요.』 쉽게 말해 朴의원은 낮에는「안기부특보」,밤에는「盧泰愚의 비밀참모」로 더블플레이를 한 것이다.그는 당시 『張부장(張世東안기부장)이 알면 큰 일 난다』고 말하곤 했다. 어쨌든 朴의원은 배우인 盧泰愚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을 움직인 막후 연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朴의원은 盧대표에게 정국변화에 대한 상황인식을 불어 넣었을뿐 아니라 盧대표의 주요연설문이나 각종 행사의 말씀자료까지 챙겼다.
그러나 朴의원이 盧泰愚대통령만들기에 기여한 공로는 뭐니뭐니해도 사조직 월계수회일 것이다.황태자의 권력상실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때는 대권창출의 주역임을 자부했던 월계수였다.월계수회는 권력과 사조직의 관계를 말해준다 .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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