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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유혹 남자의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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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자란 너나 할 것 없이 평생 ‘강한 수컷’으로 보이고 싶은 강박감에 포박당한 어쩔 수 없는 존재다. 파울로 코엘료는 남성들의 평균 섹스 지속시간이 11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11분’ 마저 길게 느껴지는 위기의 남자들에게조차 강한 수컷의 이미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자 꿈이다. 결국 남자의 위기는 강한 수컷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표출된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고(故) 미당 서정주 선생. 물론 그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말했던 바람이 단지 남자들의 속된 바람기를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역시 평생 졸업할 수 없던 것이 다름아닌 ‘여자’라고 했다. 얼마 전 ‘내 남자의 여자’라는 방송 드라마로 또 한번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작가 김수현씨는 그 드라마가 종영될 즈음 ‘여자의 가장 큰 공포는 남자의 변심’이라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남자의 가장 큰 공포는 뭘까? 다름 아닌 ‘여자의 외면’이다. 신정아라는 35살 난 여자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배경에는 바로 그 여자의 시선에서 외면당하지 않으려는 이 나라 사내들, 특히 위기의 남자들의 애절한 몸부림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첫 번째로 불거진 변씨는 1949년생으로 아직 50대다. 그런데 변씨보다 한 살 많은 홀거 라이너스라는 독일작가가 『남자 나이 50』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50대 남자의 외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달콤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독약도 없다고! 사실 남자에게도 폐경기가 있다. 월경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남자가 폐경을 맞을 일이 있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35년간 심리치료사로 일해온 제드 다이아몬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피로가 밀려오고, 성관계에 자신을 잃으며, 심리적으로 짜증이 늘고, 우울한 기분에 자주 사로잡힌다면 남자의 폐경기를 의심해 봐야 할지 모른다. 이때는 왠지 모를 고립감에 빠지고, 불안감이 증가하며 젊은 여성과의 불륜을 상상하거나 실행에 옮겨 자신의 시들어가는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변씨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자의 인생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첫 번째 인생의 봉우리에 오르려면 ‘사춘기’라는 계곡을 건너야 하고 두 번째 인생의 봉우리에 오르려면 ‘폐경기’라는 협곡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일까? 15세 전후의 사춘기 소년과 50대의 장년 남자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고 철없는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에 벌이는 일은 기껏해야 가출이지만 폐경기에 벌어진 일은 수습이 안 된다.

떠들썩한 신정아 게이트 뒤에는 바로 이런 폐경기 위기의 남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들의 사그라지지 않은 수컷 본능과 그것을 겨냥한 이브의 유혹이 빚은 크고 작은 해프닝들이 모여 결국은 해일처럼 이 나라를 덮치고 있는 셈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