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나선 상아탑(선진교육개혁: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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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공부않는 대학 문닫아라/선별지원… 평가등급 신문에 공개/영 대학,전세계 프로젝트 유치전/한국대학 총 연구비 영 1개대 “20%”
영국 대학은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보수당 정부가 빼든 교육개혁의 칼끝이 대학의 등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의 성과는 아마 20년쯤후에나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21세기에는 영국의 이름을 후진국 명단에서 찾게될 것이다. 대학이 변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영국정부가 대학개혁을 외치면서 하는 소리다.
정부는 그동안 입학부터 졸업때까지 전액을 지원해주던 학생들의 학비를 50% 삭감해버렸다. 대학이 기업들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든지,아니면 등록금을 올려서라도 부족한 재정을 알아서 보충하라는 뜻이다.<관계기사 23면>
89년엔 대학을 정부가 평가해 우수대학을 선별 지원한다는 방침을 선언했다.
영국은 90년에 수백년 전통의 종신교수제(tenure)를 폐지했고 92년 전문대학 개념인 폴리테크닉을 모두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결과적으로 대학의 수는 두배로 늘어났고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게 됐다. 영국은 정부나 국민 모두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이 병든 거인으로 전락한 것은 교육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잘못의 핵심은 교육에서 경쟁의 개념을 약화시킨 것이란 점도 지적됐다.
『각 대학에 대한 정부의 평가는 냉엄합니다. 각 대학의 모든 학과는 그해에 배출한 박사 수와 교수들이 발표한 논문이 몇개인지 반드시 컴퓨터에 기록해야 합니다. 기업들로부터 받은 프로젝트수와 연구지원비 총액,연구를 통해 새롭게 개발한 기술의 유무도 포함됩니다.』
교육부 관계자의 말이다. 평가방법도 독특하다. 평가위원회 위원들은 대학교수가 아니라 대부분 기업인들이다. 평가에 마키팅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다.
철저히 분석·해부된 결과는 매년 신문에 공개된다. 학생들은 가고 싶어하는 대학의 실태를 자세히 알고 고를 수 있다.
올초에 발표된 결과는 종합 1위 케임브리지대,2위 옥스퍼드대,이공계 1위 임페리얼공대,사회과학 1위 런던정치경제대학이었다.
『과거에는 대학이 적당히 기업으로부터 돈만 받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 자체가 교육상품을 생산하고 연구성과와 재정상태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코웬 런던교육대학 교수의 말이다.
『앞으로 20년 이내에 현재 대학중 30%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대학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이처럼 절박하다. 91년 에섹스·켄트·랭커스터대 등 6개 대학 총장들은 성명을 냈다. 『대학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대학들은 어쩔 수 없이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연구프로젝트를 따내고 비싼 등록금을 받을 수 있는 외국학생 유치에 총력전을 펼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내몰렸다.
○피나는 자구노력
『21세기를 내다보자』며 영국정부가 앞장서 벌인 이같은 교육개혁은 하나둘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네마리 용에서 지렁이로 전락했다』는 비아냥을 듣는 한국이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 영국의 사례다. 국가발전의 정체와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나라의 대학을 비교해보자. 이공계열에서 독일 아헨공대와 함께 유럽의 쌍벽인 런던 임페리얼공대. 이 대학이 92년 10월부터 93년 9월까지 1년간 따낸 연구비 총액은 1천8백60억원이다. 영국은 물론 미국·일본·프랑스 등 전세계 기업들을 상대로 프로젝트 유치 총력전을 벌인 결과다. 기업으로부터 따낸 연구비는 최첨단 장비를 구입하거나 우수교수 초빙,학생들의 장학금 등으로 지급된다.
서울대가 92년 한햇동안 기업들로부터 따낸 연구비 총액은 이공계와 인문·사회분야를 다합쳐 1백22억원. 임페리얼공대의 15% 수준이다. 그나마 국내 최고인 서울대가 그렇다는 얘기다. 서울대를 포함,국내 1백36개 4년제 대학 전체가 92년 한햇동안 기업들로부터 받은 연구비를 다합쳐도 4백15억원. 임페리얼공대 한곳 연구비의 5분의 1 수준이다.
○성과없으면 떠나라
영국과 우리의 경제력 차이를 고려한다해도 1백36개 국내 대학 연구비를 다 합친 것이 영국 한개 대학의 반의 반도 안되는 것이 바로 우리 실정이다.
기하급수적인 자기 증식과 빈곤의 악순환­. 두나라 대학의 실정에 대한 단적인 표현이다.
눈을 돌려 미국의 예를 보자.
「퍼블리시 오어 페리시(publish or perish)」. 미국대학을 움직이는 기본 원칙이다. 연구결과를 내놓든지,아니면 대학을 떠나라는 말이다.
총장·학장·평교수를 가릴 것 없이 미국 대학교수들은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 혈안이다. 기업의 프로젝트건,기부금이건 어떻게해서든 기금을 모아 학교를 발전시켜야 한다.
미국에선 해마다 각 대학을 평가하는 보고서가 여러종 발간된다. 올 3월에는 유력한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가 각 대학을 해부했다.
타대학 교수들의 평가,학생선호도,현지 엔지니어들의 평가,연구활동 실적,연구비 총액,기자재 구비실태,교수 1인당 학생비율 등이 평가기준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영리가 목적인 입시 학원들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고작이다. 해마다 학원들은 각 대학의 예상커트라인을 그 대학의 수준인양 발표해 버린다.
얼마나 연구를 많이 하고,장학금을 어느정도 지급하며,얼마나 좋은 시설을 갖췄는지 평가대상이 전혀 아니다.
교육부는 90년 선진국들처럼 각 대학의 수준을 평가·공표하는 대학인정평가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학들은 난리를 쳤다.
우수대학을 먼저 지원하는 행정·재정상의 차등을 두면 대학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각해지고 열등한 대학으로 평가되면 학생데모 등 학내외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최근 마지못해 『94년부터 7년에 한번씩 대학을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교육개방 눈앞에
그런 평가는 국내에선 통할지 모르지만 국제화시대에 매년 피를 말리는 사투를 벌이는 다른 나라 대학들에는 씨도 안먹힌다.
96년부터 교육시장이 개방된다.
외국 유수의 대학들이 세게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한국에 「질좋은 교육」이란 상품을 들고 무더기로 몰려올 것이 뻔하다.
그때 한국의 대학들은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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