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KAL기 격추/구소,은폐에 급급/러 신문 극비문서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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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진상규명보다 정당성 변명 부심/국방 “미 정찰기와 모양 비슷 착각”/「격추명령」은 언급조차 안해
구 소련은 지난 83년 9월1일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당일 2차례에 걸쳐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으며 이 회의에서 사건진상 규명보다는 그들의 정당성을 강조키로 결정하고 이를 프라우다지에 싣게 한 것으로 밝혀졌다.
로시이스카야 가제타지는 11일자 1면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한국 여객기 격추 진상을 어떻게 은폐했는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자신들이 입수한 극비문서를 게재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공산당 정치국원들은 사건발생 당일인 9월1일 열린 비상회의에서 격추명령은 아예 문제삼지 않았으며 주로 사건경위를 어떻게 전세계에 해명할지에 논의의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정치국원 15명은 미국 등이 사건내용을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우려를 표시했고 진상을 작극 공표할 것인지,아니면 다소 뜸을 들여 공개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아무도 격추명령의 정당성 여부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돼있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당시 외무장관은 이 자리에서 격추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정당하게 행동했으며 그래서 총격이 가해졌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당시 국방장관은 KAL기가 요격을 받게 된 것은 이 여객기가 5백㎞ 이상 영공을 침범했으며 외관상 미국의 RC­135 정찰기와 유사해 착각을 일으킨 때문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이 문서는 밝히고 있다.
한편 정치국 교체위원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미국의 추적장치들이 이 여객기의 항로이탈 사실을 알았음이 틀림없지만 이를 소련측에 사전 경고해주지 않았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정치국 회의에서는 또 사고전역에 일본이 20여척의 어선을 보냈으며 이 지역에는 소련의 배도 있다는 사실과 일부 잔해가 이미 인양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로미코는 미국이 블랙박스를 인양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정치국 회의는 『우리가 격추시켰다고 말하자. 물론 처음에는 이 여객기의 첩보활동에 대해 말하고 그후 격추되었다고 말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음날 프라우다지에는 대한항공기의 비행경로를 그린 지도와 함께 정치국에서 결정된 논리에 따른 기사가 실렸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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