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아프간 인질사태를 보면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들의 행위는 성전(聖戰·지하드)이 아니다. 이슬람에서 진짜 ‘큰 성전(지하드 아크바르)’은 관용과 자애로 이슬람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선교(다와)하는 것이다. 납치범들의 잔인한 행위는 이슬람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고, 이제 새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한국의 이슬람 공동체에도 치명타를 가하고 있다. 이들은 이슬람과 문명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2일자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한 것처럼, 일부에서 이번 사태를 ‘신앙의 충돌’로 보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이슬람권처럼 타 종교가 침투하기 어려운 지역은 없을 것이다. 16세기 이래 서구 열강들은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 전파를 ‘문명의 사명(mission civilitas)’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아시아·아프리카·중동·남미 지역에서 식민지를 팽창해 나갔다. 이들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독교 전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슬람권만은 예외였다.

 왜 그랬을까. 십자군전쟁을 비롯한 두 종교 간의 오랜 역사적 앙금도 작용했겠지만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갖는 자긍심 때문에 더욱 그랬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름만 다를 뿐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 무슬림들은 구약과 신약을 인정하고 아담·노아·모세·아브라함, 그리고 예수에 이르는 모든 예언자들을 추종한다. 이와 더불어 가브리엘과 같은 천사의 존재, 최후의 심판 날, 그리고 정명(定命)을 믿는다. 이를 이슬람의 여섯 믿음(六信)이라 하는데 그만큼 기독교의 교리가 이슬람에 많이 녹아 있는 것이다.

 다름이 있다면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코란과 무함마드를 마지막 성전(聖典)과 예언자로 내려보내 기독교가 이루지 못한 것을 완성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교리상의 우월성을 믿고 있는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선교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수세기에 걸쳐 이슬람을 모태신앙으로 대를 이어온 이들에게 종교는 선택사안이 아니라 생존과 정체성의 문제다. 아프간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사형선고와 같은 혹독한 처벌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법적 처벌을 차치하더라도, 개종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자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개종이 구원으로 비칠지 모르나 이슬람권에서 이는 한 개인과 가족의 파멸로 귀결될 수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우리의 봉사활동을 보는 현지의 시각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이슬람권의 한 언론인은 필자에게 한국 기독교단체들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의 봉사·선교 활동을 ‘미국의 군사적 평정에 뒤이은 한국의 종교적 침투’로 비유한 바 있다. 심히 걱정이 되는 대목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현지에서 봉사에 임해도 문명과 신앙의 충돌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타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사태도 봉사단이 현지적응준비는 했겠지만, 이슬람과 아프간에 대한 단편적 또는 아전인수식 이해와 종교적 이상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아무쪼록 아프간 인질사태가 더 이상 희생 없이 종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탈레반이 인질들을 석방할 수 있도록 아프간 사회, 이슬람권, 그리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동시에, 미국과 아프간 정부가 인도주의적 유연성을 통해 이번 사태 해결에 전향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설득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외과